블프 세일

지갑이 열리는 소리

by 수리양

한국에는 설과 추석이 큰 명절이 듯 영국에는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가장 큰 명절이다. 크리스마스 아침, 트리 밑에 산처럼 쌓여있는 선물을 발견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어른들이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똑같은 크리스마스 아침의 환희를 선물한다. 우리 집 이야기다.


큰 아이의 첫 크리스마스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당시 살던 집이 정말 작았어서 트리가 있었는지, 선물이 산처럼 쌓였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기억을 가지지도, 그 문화에서 살지도 않았던 내게 크리스마스에 그렇게나 많은 선물을 사는 것은 참 생소하고 불필요하게 느껴졌었다. 우리는 보통 선물을 하나씩 사주지 않았나 싶은데 영국에선 마치 질보다는 양인 것처럼 작은 것 하나하나 포장을 하고 아이들은 그것들을 풀어보는 재미를 갖는다.


그러다 문득 우리 설날을 떠올렸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친척들 간의 왕래가 왕왕 있었고 설날이면 전날인 12월 31일에 큰댁에 모두 모였었다. 잔치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고, 며느리들은 전을 부치느라 바쁘고, 남자 어른들은 밤늦게까지 음식과 바둑과 카드와 고스톱으로 연말 파티를 했다. 아이들도 내일 세뱃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이 방 저 방에 공간이 있으면 이불을 깔고 잤었다.


아이에게 설날은 세뱃돈이었다. 빳빳하게 어른들이 미리 은행에서 바꿔오신 신권 지폐 돈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넙죽넙죽 잘도 받았었다. 덕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중요한 건 내 손에 쌓이는 지폐의 수다. 나중에 우리가 한국에 살 때 나의 두 딸들도 세뱃돈의 맛을 알아버려서 그날만큼은 곱게 한복을 입고 턱수염이 까슬한 할아버지가 볼에 뽀뽀를 요구해도 대충 들어줄 정도가 되었다. 세뱃돈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편의 크리스마스 문화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 함께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장난감의 부피가 커서 산처럼 쌓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선물의 부피는 작아지고 가격은 높아져서 조금 어렵게 되긴 했다.


나는 선물을 살 때 들이는 고민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받고자 하는 선물의 리스트를 받아 사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선물을 열어보는 궁금증이나 설렘은 없어졌다. 내가 요구한 걸 받게 될 것이기에. 동시에 실망도 없어졌을 수 있다. 원하지 않는 선물인 경우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거나 거짓 미소를 만들어내야 하는 수고로움도 없어졌다.

그래서 나의 선물 사는 재미도 없어진 게 사실이다. 그냥 장 보러 가듯이 위시 리스트를 들고 이제는 아마존에서 일괄 주문하면 끝인 세상이다.

뭔가 지갑만 열면 되는 것 같아 씁쓸하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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