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e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서른 살에 스윙 댄스를 배우기 시작해, 매주 토요일마다 늦은 밤까지 춤에 빠져 살았다. 재즈 음악에 맞춰 리더와 함께 교감하며 춤을 추는 건 즐거웠고, 낭만적이었으며, 때론 뜨겁게 황홀하기까지 했다. 지터벅 2개월, 린디 6개월의 정규 수업이 끝나자 동기들은 다른 스윙 바에 춤을 추러 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스윙 바로 춤을 추러 간다는 건, 처음 본 리더와 린디합을 맞춰보는 '설렘'이자 '도전'이었다. 그동안 쌓은 춤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두려움에 선뜻 용기 내지 못했던 나는, 스윙 경력 10개월 차에 드디어 주 무대인 교대에 있는스윙 바를 벗어나, 신논현역 근처 스윙 바에 춤을 추러 갔다.
바에 도착해서 20분쯤 지났을까? 낯선 리더가 내게 다가와 춤을 청했다. 내 춤 실력에 아직 자신이 없어서 잔뜩 긴장한 채 리더의 손을 잡고 쭈뼛쭈뼛 바 중앙에 섰다. 마침, 스피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Fly me to the moon' 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리더는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부드럽게 춤을 리드했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며 나는 그동안 쌓아온 여러 동작들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낯선 리더와 처음 합을 맞춘 것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물 흐르듯이 춤이 연속성 있게 이어졌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좋았고, 노래가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나의 첫 10Km 마라톤이 그랬다. 낯설지만 설렜고, 떨렸지만 흥미로웠다. 그렇게 첫10Km 마라톤의 경험은 강렬하고 뜨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올해 4월 초에 아이들과 2주 일정으로 부산 친정에 다녀왔다. 부모님이 새벽과 저녁에는 아이들을 봐주셔서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새벽엔 바닷가 러닝을 즐기고, 4월 10일엔 올해 목표 중 하나인 '나 홀로 10Km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했다. 당시 달리기 8개월 차로 이틀에 한 번 5Km를 달리고 있었다. 근데 5Km도 능숙하게 달린 게 아니라, 마지막 4-5Km 구간엔 죽을 것처럼 힘들어서 가뿐 숨을 몰아쉬며 안간힘을 써서 간신히 완주했다. 빠른 속도로 달린 것도 아닌데 완주하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두 번 7Km를 달리긴 했지만 더 먼 거리는 엄두가 안 났다. 솔직히 지금 수준에 10Km 마라톤? 게다가 혼자서 도전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도전하기로 한 날 새벽, 집을 나서는데 마라톤을 미루고 싶었다. 10Km를 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요즘 달리고 나면 무릎이 시큰거리잖아.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어.', '10Km를 뛰려면 간단한 스트레칭이라도 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일어나서 바로 옷만 입고 나왔잖아. 몸이 굳어 있는 채로 10Km를 달리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 '꼭 오늘이 아니라도 다음 주에 도전하면 돼지. 부산에 며칠 더 있을 거니까.' 혼자 계획한 거니 지키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5Km만 달리고, 다음 주에 10Km에 도전하자.'며 스스로와 타협했다. 집에서 미포 철길 입구까지 약 1Km. 짧지 않은 거리라 몸도 풀고, 거리도 채울 겸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바로 살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은 처음부터 '잘 풀리는 날'이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지 않나? 마법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부모님 집에서 미포 철길 입구까지는 4개의 건널목을 지나야 한다. 그중 두 개는 신호등이 없고, 두 개는 신호등이 있는데, 둘 다 내가 도착하기 직전에 초록불로 반짝하고 바뀌었다.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속으로 외치며 멈추지 않고 달렸다. 처음부터 모든 일들이 매끈하게 흘러갔고, 차츰 달리기에 리듬감이 생겨났다.
미포 철길 입구에 도착해 표지판을 봤다. <BLUE LINE PARK>는 미포 블루라인 광장에서 시작해 미포 정거장-달맞이 터널-청사포 정거장-다릿돌 전망대-구덕포를 지나 송정 정거장에서 끝이 났다. 입구에서 청사포 정거장까지는 2Km, 입구에서 송정까지는 총거리는 4.8Km였다. 내 안에서 조금은 들뜬 속삭임이 들렸다.
5Km를 달린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송정까지 5Km 달리고 돌아올 땐 살살 뛰든 힘들면 걷든 10Km를 채울 수 있지 않겠어?
5Km 달리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부터 미포 철길 입구까지 이미 1Km 정도를 달렸으니 마음의 부담도 적었다.
그렇게 '나 홀로 10Km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서 한 앳된 여성 러너가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당당하고 힘차게 뛰는 모습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속도감 있게 달리는 여성 러너들을 만난 날은 평소보다 좋은 기록이 나오곤 한다. 리드미컬하게 달리는 그녀들의 자세와 빠른 속도가 내 몸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3Km쯤에서는 또 다른 여성 러너를 만났다. 나보다 5m 정도 앞서 달리고 있어 내 페이스메이커로 점찍었다.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1Km 정도 함께 달렸는데, 힘든지 그녀가 달리기를 멈추고 걸었다. 함께 더 달리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녀를 앞지르며 고마운 마음을 바람결에 담아 보냈다. '덕분에 더 힘내서 달릴 수 있었다고'
누군가 부산에서 '바다를 즐기며 달리기 좋은 길'을 묻는다면 단숨에 '미포 철길'을 추천하고 싶다. 가장 큰 매력은 뛰는 내내 새파란 하늘과 드넓은 푸른 바다를 마음껏 눈에 담으며 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입구에서부터 송정역까지 모든 산책로가 평평한 나무데크로 되어 있어 뛰기 정말 편했다. 가끔 나오는 내리막과 오르막은 이벤트처럼 지루함을 덜어주는 재밌는 존재였다. 철길을 따라 달리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철길 곁에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 같은 텃밭과 가정집은 정겨운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달리느라 몸이 뜨거워져도 알싸하고 시원한 바닷바람과 중간중간 있는 소나무 그늘들 덕분에 땀을 식힐 수 있었다. 멀리 반짝이는 송정 해변이 보였을 때는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는지 모른다.
"엄마, 나 송정역까지 달려왔거든. 돌아가려면 시간 꽤 걸리니까, 애들 일어나면 아침밥 좀 부탁해요."
"달려서 송정까지 갔다고? 아고, 그 먼 거리를. 애들은 아직 자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힘들면 걸어와라."
반환점인 송정역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 남은 건 5Km. 모자를 벗어 한소끔 끓어오른 열기를 식힌 후 미포 철길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되돌아가는 길의 풍경은 올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웠다.점점 다리가 무거워지며 힘이 드는 와중에도 곳곳에 핀 사랑스러운 노란 유채꽃이 눈에 띄었다.
구덕포와 바다 위로 길게 뻗은 투명한 다릿돌 전망대를 지나니 드디어 청사포 정거장이 보였다. '와, 이제 2Km 정도 남았구나.' 피니쉬 라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보폭은 넓어졌고 속도는 빨라졌다. 내 안의 폭주 기관차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이게 바로 러너들이 겪는다는 러너스 하이구나! 와우!' 그때 처음 경험한 러너스 하이의 감각은 지금도 생생하다.(*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 :30분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느낌이 드는 것)
곧게 뻗은 데크길과 바다 경치는 장점이지만 단점이 되기도 했다. 비슷비슷한 바다 풍경이 펼쳐지니 입구에 거의 다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염없이 달려도 도무지 입구가 나오지 않으니 나는 점점 지쳐갔다. '힘들어. 언제까지 달려야 해?'라고 아우성치는 이성을 '그래도 바다 보며 달리니 얼마나 낭만적이야'는 감성이 다독였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나를 믿어.'라며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드디어! 초승달 모양의 해운대 백사장과 즐비하게 늘어선 호텔들이 보였다. 나의 달리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갓 데뷔한 배우가 '신인상'을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10Km 완주의 순간! 나는 울컥했다. 어렵게 발을 들인 신세계에서 이제까지의 '노력'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해냈다며 두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마음속으로 '와'하고 환호했다. 5Km씩 두 번의 기록이 선명하게 찍힌 핸드폰은 나만의 트로피였고, 길가에 핀 유채꽃은 시상식 스텝이 건네주는 꽃다발이었다. 다리가 풀리고 땀 때문에 몸이 축축했지만, 그저 이 순간이 좋아서 배시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달려온 시간과 남편, 남동생, 부모님, 아이들이 떠올랐다. 10Km 완주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의 기여 덕분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준 겹겹의 세상 위에서 나는 달리기를 즐길 수 있었다.
"야, 너도 10Km 충분히완주할 수 있어!"
"어후, 나 못해. 만약에 꼬챙이 들고 누가 쫓아온다면 10Km 달릴지도 모르겠다."
어제 친한 친구를 만나 달리기 이야기를 한참 했다. 친구는 3년 차 러너로 매일 새벽 5시에 집 근처 공원을 6Km씩 달린다. 내가 "너도 10Km 충분히 달릴 수 있어."라고 하니 "6Km도 너무 힘들어."라며 손사래를 쳤다. "6Km 달리고도 땀으로 샤워할 정도야. 기진맥진해서 무릎을 쥐고 숨 고르기를 한참 해. 갈증도 엄청 심하고." 친구에게 내 첫 10Km 경험을 들려줬다. 그리고 '5Km 두 번 달린다고 생각하기, 러너스 하이 믿기, 반환점 돌아 달리는 걸로 코스 잡기' 등의 팁을 알려줬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곤 "그래? 5Km 달리고 다시 달린다는 거지? 러너스 하이도 궁금한데 나도 한 번 해볼까?" 라며 10Km 달리기에 의욕을 보였다.
초보 러너에게 '10Km 달리기'는 조금 두렵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목표다. 첫 10Km 마라톤을 해보니, 막연한 두려움을 자신감과 성취감,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꿀 수 있었다. 심지어 '좀 더 일찍 도전해 볼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왠지 더 멀리 달리고 싶은 날, 얼굴에 닿는 바람이 좋은 날 그냥 한 번 툭 도전해보자. 꽤 '낭만적인 경험'이자 '내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날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