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_천천히 달려도 괜찮아

나다운 속도로 달리기

by 런예지




다른 사람들 기억 속 달리기는 어떤 모습일까? 내 기억 속 달리기는 언제나 ‘전력 질주’였다. 운동회 날 잔뜩 긴장한 채로 어릴 적 '나'가 출발선에 서 있다. 주먹을 꽉 쥔 채 곧 달려 나갈 태세다. '탕'하는 총소리에 맞춰 이를 악물고 힘껏 내달린다. 부지런히 팔과 다리를 저어 보지만 친구들은 어느새 성큼성큼 앞서 나간다. 친구들의 뒤통수를 보며 최선을 다해 달리지만 달릴수록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기운 빠지는 상황이 연출된다. 결국 꼴찌로 결승선에 들어와 헉헉거리며 숨을 고른다. 왜 달려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잘 달릴 수 있는지 모른다. 그저 달리기가 싫다.



장거리 달리기는 그나마 나았을까? 장거리 달리기 또한 모든 힘을 짜내 열심히 뛰어야 헸다. 장거리 달리기는 오랜 시간 달려야 하니 처음부터 단거리 달리기처럼 속도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체력 측정’이라는 목표 아래 오버 페이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 평소에 달리지 않던 학생들이 갑자기 억지로 달리니 포기하거나 지쳐서 쓰러져 보건실에 가는 친구까지 있었다. 정말 학창 시절에는 달리면서 단 한 번도 즐겁거나 재밌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게 동생은 달리기를 시작하는 팁으로 이렇게 말했다.


누나, 천천히 뛰어.







“정말? 천천히 달려도 된다고?”

"옆 사람이랑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뛰어. 사람들은 보통 너무 빨리 달리는 경향이 있어.

그 속도로는 500미터도 못 가서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도 지쳐.”

“맞아, 그래서 나는 달리기는 늘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느리게 뛰어봐. 그래야 길게 뛸 수 있어.”

‘천천히 달려도 괜찮다’는 동생의 말은 내겐 너무 신선했다.



천천히 달린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속도를 말하는 걸까? 전력을 다해 뛰는 속도와 조금 지루하다 싶은 속도의 중간 즈음을 말한다. 보통 초보 러너는 1Km를 달리는데 7분-8분 정도의 페이스로 달린다. 다양한 속도로 달리면서 내게 맞는 편안한 지점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러닝 어플을 이용하면 중간중간 페이스를 알려주기 때문에 조절하며 달릴 수 있다. 속도 조절이 어렵다면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것도 좋고, 유튜브에서 러닝 음악을 검색해서 리듬감 있게 뛰는 것도 도움이 된다.


‘천천히 달려도 괜찮다’는 생각은 나에게 즐거운 러닝을 선물했다. 빨리 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내게 맞는 속도로 달리니 즐겁고 자유로웠다. 내 컨디션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며 달리니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육아에 치여 사색 따위 잊고 살았는데, 천천히 달리니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천천히 달리니 길가에 핀 꽃, 무성한 풀, 나무들의 변화에도 민감해져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앞서가는 사람에게 관심도 가져보고, 나를 지나치는 러너에게 가볍게 인사도 하는 여유까지 가질 수 있었다.



천천히 달리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그동안 너무 조급하게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뚜렷한 목적의식이나 방향성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꽉 채워 힘겹게 살았다. 내 또래의 나보다 높은 성취를 한 반짝이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허겁지겁 쫓아가기에 바빴었다. 내 능력보다 너무 빨리 달려서 몸이 상하기도 했고, 진이 빠져서 주저앉아버리기도 했다. 그리곤 내 능력을 여기 까지라며 스스로 한계를 긋고 실망했다.






작가이자 러너 김연수도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천천히 달리기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김연수는 1998년 다니던 잡지사를 그만둔 뒤 집에서 놀다가 시간이 남아도는 바람에 운동장을 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년에 걸쳐서 달리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일본 만화 <<좋은 사람>>에 나오는 조언, 즉 "가장 천천히 뛴다고 생각하면 가장 빨리 뛸 수 있어"를 읽고 크게 깨달은 뒤 매일 달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천천히 내 속도를 유지만 해도 꾸준히 달린다면 언젠가 원하는 목표에 닿을 수 있다.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나다운 삶의 속도와 방식을 알아가고 있다. 이젠 빨리 달리는 사람을 봐도 크게 부럽지 않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페이스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세상의 속도와 온갖 유혹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안정된 페이스로 하루하루를 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