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8일, 생애 두 번째 10Km 마라톤을 완주했다. 저녁 7시 25부터 밤 9시까지 쉼 없이 달렸다.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는 주위가 밝았는데, 달리는 동안 해가 지고 캄캄한 어둠이 내렸다. 마라톤을 마치고 숨을 고르며 가볍게 걸었다. 빠르게 돌던 피는 서서히 제 속도를 찾았고, 나른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이 밀려왔다. 기말고사를 끝낸 학생처럼 홀가분함에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지인들에게 완주 소식과 인증 사진을 보냈더니 따뜻한 격려와 축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집에 와서 씻고 두 번째 마라톤 참가 후기를 블로그에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기록을 자세히 보고 깜짝 놀랐다. 맙소사! 10Km를 완주하는데 걸린 시간이 4월에 비해 3분이나 늦어진 게 아닌가? 3개월 동안 꾸준히달렸는데도 달리기 실력이후퇴할 수도 있는 걸까?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실망감이 밀려왔다.
첫 번째 마라톤은 '내친김에 10Km 완주'였다면, 이번 마라톤은 '첫 공식적인 마라톤 도전'이었다. 참여한 대회는 LONGEST RUN으로 2016년 '세상에서 가장 긴 달리기'라는 메시지와 함께 미세먼지 저감을 목적으로 시작된 친환경 마라톤이다. 이번 마라톤은 코로나 피해 확산 및 방지를 위해 언택트 온라인 마라톤으로 진행되었다. 참가 방법은 의류를 기부해서 리폼을 받는 의류 기부 참가, 친환경 티셔츠가 포함된 레이스 패키지를 받는 유료 기부 참가, 무료 참가가 있었다. 나는 무료 참가로 롱기스트 런 앱을 다운로드하여 7월 9일부터 7월 18일에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서 GPS러닝 앱을 켜고 자율적으로 달리는 것을 선택했다.
언택트 대회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대회 참가는 처음이라 기대와 설렘을 안고 대회 날을 준비했다. 여러 유튜브 영상을 보며 마라톤 전 워밍업을 공부했다. 특별히 훈련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2-3일에 한 번씩 꾸준히 달렸다. 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 마라톤이라 어디를 달릴지 많이 고민했는데, 한강, 남산, 여의도 공원 등 특별한 곳을 달리고 싶었지만 내가 달리는 동안 혼자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남편이 눈에 밟혀 대신 집 근처 호수공원을 달리기로 했다. 그리고 대회 이틀 전 ‘공개 선언 효과’를 노리고 결연한 마음으로 블로그에 출사표를 올렸다.
'이번 대회 내 목표는 10Km를 1시간 15분 이내로 들어오는 것이다. 4월 10Km 기록은 1시간 17분이었다. 지난번보다 1분이라도 더 빠르고 강해진 나를 확인하고 싶다. 5Km를 넘기면 더 가볍고 힘찬 움직임으로 웃으며 달리고 싶다. 사실 요즘 무릎이 살짝 아파서 걱정도 된다. 하지만 내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고 싶다. 롱기스트 런 앱을 켜고, 러닝화를 단단히 조여매고, 힘차게 땅을 박차며 달려보자. 진한 땀 냄새를 풍기며 성취감 가득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는 나를 상상한다.'
"하나, 둘. 하나, 둘" 저녁 7시, 달리기 30분 전부터 공원에서 워밍업을 시작했다. 평소에는 달리기 전에 5분 정도 몸의 순환과 호흡을 돕고 근육을 깨워주는 의미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데, 대회이니만큼 워밍업도 공부한 대로 했다. 먼저 관절 체조를 하고, 10분 정도 동적 스트레칭을 했다.운동 전에는 정적 스트레칭을 하는 것보다 동적 스트레칭을 하는 게 관절의 가동성을 높이고, 부상을 예방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무릎 들어 올리기, 발차기, 골반 돌리기, 발 굴리기 등의 정적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전에 3분은 힘차게 걷고, 5분은 편안하게 뛰고, 10초 동안 짤막하고 빠르게 5번 뛰었다.
LONGEST RUN과 런데이 어플을 동시에 켜고 마라톤을 시작했다. 긴장감 도는 발자국이 하나둘씩 찍혀 나갔다. 호수 주위를 돌며 1Km, 2Km 달리는 거리를 쌓아나갔다. 매일 달리는 호수 공원이지만, 주말 한여름밤 달리기는 '작은 축제 현장'이었다. 평소엔 한가로운 호수공원인데 주말이라 놀러 나온 가족들과 데이트하는 커플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가 지면서 하늘이 붉은색에서 분홍, 보랏빛으로 변했다. 호수를 한 바퀴 돌 때마다 복잡다단하고 미묘하게 변하는 하늘이 신기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림 같은 하늘과 잔잔한 호수를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힘들어서 자세가 무너지려 할 때는 아름다운 조명과 함께 높낮이를 달리하며 춤을 추는 분수를 감상하며 배에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8시가 지나자 완전히 해가 지고 주위가 캄캄해졌다.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 혼자 달리는 느낌이었다. 6Km를 넘어서자 꽤 힘들어졌다. 호수를 뱅글뱅글 도는데 '1Km가 이렇게 멀었나? 도대체 몇 바퀴를 더 돌아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며 시시각각 지쳐갔다.8Km-9Km 구간에서는 작게 허물어지며 몇 번 걷기도 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완주는 해야지.'라고 나를 다독이며 다시 달렸다.힘든 순간 나를 스쳐 달리는 사람들을 함께 대회에 참가한 러너라 생각하며 힘을 냈다. 완주를 목표로, 조금 더 발전한 나를 기대하며 마지막 한 발까지 꾸준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달렸다. 그래서 완주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주의 기쁨을 기록의 아쉬움이 집어삼켰다. 10Km를 달리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19분 12초, 페이스는 7분 54초. 4월 기록 1시간 17분 55초보다 3분이나 느려졌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 는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이 떠올랐다. 6월에 이사한 후 습관이 흔들려 달리기 연습을 게을리한 것이 결과로 나타난 걸까? 더 열심히 연습하지 못한 걸 자책하고 기운이 빠져 있을 때, 누적된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누적 거리 559Km. 달린 시간 75. 소모한 칼로리 28,642. 559Km를 42.195Km로 나누면 무려 13번의 풀 마라톤이 나올 만큼 긴 거리였다. 지난 8월부터 하루에 4Km-5Km 정도씩 꾸준히 달려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오늘의 10Km 마라톤은 그저 559Km를 달린 결과물 중 '일부분', 내가 11개월 간 달려온 날 중 마지막에 찍은 '점'에 하나에 불과했다.이 점 하나보다 '그동안 쌓아 온 점들'과 '앞으로 찍을 점들'로 내 삶에서 어떤 매력적인 선을 그릴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59Km를 누적하는 과정에서 내 몸과 마음, 일상에 일어난 변화를 찬찬히 짚어봤다. 출산 후 책 한쪽도 읽기 힘들 정도로 몸과 정신력이 약해졌는데, 4-5시간 집중해서 읽고 쓸 수 있는 체력과 집중력이 생겼다. 거뜬해진 체력으로 달리기 전보다 훨씬 가족과 밀도 높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분에서 시작해 1시간까지 꾸준히 달리는 시간을 늘리며 크나큰 성취감과 용기를 얻었다.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이 나를 습격할 때는 달리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정리하고 씻어내는 습관이 생겼다. 달리면서 느낀 희열과 기쁨, 갖가지 삶의 이야기들을 일기와 에세이로 블로그에 기록하게 되었다. 달리기는 나에게 '명상'이자 '치유'이고, '내면 성장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기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3개월 전보다 후퇴한 10Km 마라톤 기록을 손에 들고 처음엔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그것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누적해 온 것의 가치'에 주목하게 되었다.559Km를 달려오며 '내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다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달리기가 내 몸에 촉촉이 스며든 정도로 생각했는데, 화학반응을 일으켜 내 체질과 삶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꾸준히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그 가치를 내 몸에 선명하게 새기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누적의 힘'이라는 깃발 아래 삶의 여러 분야에 노력을 쏟고 있다.
데이터 분석가 송길영은 저서 <그냥 하지 말라>에서 지속하는 것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실행을 지속하면 어느 순간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잡아서 한 번 해본다, 그걸 숙련될 때까지 지속하면 어느 순간 예술적 형태의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가 덕업 일치의 순간이겠죠."
나는 두 번째 10Km 마라톤을 계기로 누적의 힘을 믿게 되었고,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을 만나고 있다. 지속하면 만나게 될 예술적 경험까지 기대한다. 무수히 찍은 점들이 연결되어 멋진 선이 되는 상상을 하며 어제도 달리기라는 돌 하나, 브런치 글 하나를 소중히 쌓았다.
꾸준히 누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오늘은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면어떨까? 그것이 삶에 가져온 크고 작은 변화들을 발견하는 날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