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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예지 Oct 01. 2021

8화_미니멀리스트 러너도 사는 한 가지 '러닝화'

달리기 중단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러닝화'


<아무튼, 달리기>(김상민, 위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리기 에세이다. 작가는 이별 직후 상실감을 채우려고 특별한 기대 없이 허술하게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달리기라는 ‘몸과 나누는 솔직한 대화’에 매료되어 꾸준히 달리게 되었고, 2017년 파리를 시작으로 포틀랜드, 베를린, 시카고, 오사카 그리고 서울에서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달리는 삶 속에 담긴 재치 넘치는 비유와 쉼 없이 던져지는 유머에 책을 읽는 내내 공감했고, 유쾌함을 느꼈다.     




그중 작가가 만든 ‘자본주의형 러너’라는 말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본주의형 러너는 각자의 여건에서
성심성의껏 소비하며 달리는 사람들을 뜻한다.
자본주의형 러너는 투자의 개념으로
여러 장비를 경험하며 무지의 빈틈을 메운다.


그렇다. 달리기는 집에 굴러다니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 하나 툭 집에서 신고 달리면 될 것 같아 돈이 별로 들 것 같지 않지만, 달리기의 세계에도 초심자를 유혹하는 수많은 장비들이 있다. 트레이닝복뿐만 아니라 러닝화, 시계, 러닝 삭스, 바람막이, 헤어밴드, 선글라스, 모자 등 러너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과 기능’을 장착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  




하지만 나는 작가와는 반대로 철저한 '미니멀리스트 러너'다.

‘미니멀리스트 러너’는
자신이 가진 최소한의 물건을 활용해서 달리는 사람을 뜻한다.

예전의 나라면 달리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일단 백화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용품들을 종류별로 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 넘쳐나는 육아용품 속에 최소한의 생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사’를 하거나 ‘물건을 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사보다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 훨씬 쉽고 현명한 길이라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택했다. 그러니 러닝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최대한 러닝 용품에 눈길을 주지 않고 그냥 달렸다. 하지만 미니멀리스트를 자처하는 나도 시간과 돈을 들여 산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러닝화’이다.







러닝화도 처음부터 샀던 건 아니다. 러닝화를 사게 된 계기는 달리기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찾아온 ‘무릎 통증’ 때문이었다. 무릎이 너무 뻐근하고 시큰거려 일어설 때마다 ”아구구구“하고 앓는 소리가 나왔다. 3살, 5개월 두 아기들을 종일 돌봐야 하는 내겐 정말 심각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통증의학과에 가서 진찰을 받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는 엑스레이상 이상은 없고 출산 후 관절이 약해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동을 해서 그렇다고 했다. 주사까지 맞을 필요는 없지만 물리치료는 받으라고 권했다. 아기를 맡기고 물리치료를 받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심각한 병은 아니니 당분간 달리기를 쉬고, 몸을 조심히 쓰면 괜찮겠지 싶었다.




그런데 2주가 지나도 무릎이 여전히 아팠다. 달리기에 도전한 지 겨우 한 달. 아직 ‘30분 쉬지 않고 달리기’ 도전도 성공 못 했는데 이대로 달리지 못하는 것인지 너무 속상하고 답답해서 동생에게 전화해서 조언을 구했다. 동생은 내가 7년 전 신혼여행 때 산 스케쳐스 운동화 두 켤레를 번갈아 가며 신는다는 사실을 듣곤, 경악하며 당장 버리라고 했다. '러너에게 러닝화는 필수’라며 신발에도 수명이 있어 1000Km 정도 걷거나 달리면 쿠션이 무너지기 때문에 바꿔줘야 한다고 했다. 내게 운동화는 너무 낡거나 헤지지 않으면 오래 신는 '애장품'의 개념이었는데, 러너에겐 '소모품'이라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말에 동생이 소개해 준 잠실에 있는 러닝화 전문 매장에 찾아갔다. 이 매장은 신발 34년, 파운더 슈피터와 9년째 전수받는 2세 슈피터가 함께 ‘슈 피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슈 피팅 서비스’란 고객의 걸음새, 발 모양, 체형 등의 생체역학적 특성을 파악해서 기성화 중 가장 적합한 러닝화를 추천해주는 것이다. 파운더 슈피터는 러닝화는 달릴 때의 발 특성에 맞춰 신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발 동작을 동영상 촬영해서 분석하는 동영상 발분석 My Shoe Fit 서비스를 처음으로 개발한 분이라고 한다. 슈피터의 오랜 경력뿐만 아니라 벽에 걸린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마라톤 완주 메달들로 든든한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다.



슈피터의 달리기 인생을 증명하는 빛나는 마라톤 완주 메달들



본격적으로 내 발 특징 파악하기에 들어갔다. 먼저 발 사이즈 측정기로 맨발 상태로 정확한 발 길이와 발볼을 쟀다. 두 번째론 발 아치가 높은지, 낮은지 Foot Balance 기계에 올라서서 확인했다. 세 번째론 트레드밀에서 직접 걷고, 달리는 모습을 촬영한 후 분석하는 My Shoe Fit 서비스를 받았다. My Shoe Fit 서비스로 달릴 때 발이 과내전 되는지, 중립인지, 외전인지 파악할 수 있다.


*참고 : 과내전, 중립, 외전이란?

사람이 걷거나 달릴 때 발이 착지하면서 발목이 적당히 회전함으로써 충격을 흡수하고 달리게 하는데, 발목이 안쪽으로 과하게 회전하면 과내전(over-pronation), 발목이 바깥쪽으로 꺾이거나 충격을 주면 외전 (under-pronation 또는 supination), 딱 필요만큼만 발목이 회전해서 발의 피로가 적고 대부분의 신발을 신을 수 있으면 중립이라고 한다.



트레드밀에서 걷고 달려본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해서 과내전인지 중립인지 외전인지 확인한다.
Foot Balance 기계로 발 아치 모양과 높이를 확인한다.



슈 피팅 서비스는 내 발에 대해 샅샅이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평소 240cm 사이즈 운동화를 신었었는데, 실제로 재보니 오른발은 225cm, 왼발은 227cm로 그동안 큰 신발을 신고 달려서 알게 모르게 발을 피로하게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치는 높은 편이고, 왼발은 과내전, 오른발은 중립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남편도 러닝화를 사기 위해 함께 발을 측정했는데, 남편은 거의 발의 비밀을 발굴하는 수준이었다. 발 사이즈에 비해 유난히 넓은 발볼을 가졌고, 평발에 외전이라 본인의 발에 잘 맞는 신발을 신는 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오래 걸은 날은 자주 발이 붓고, 발바닥이랑 발목 통증을 호소했었는데 그동안 치수가 맞지 않은 신발을 억지로 꿰어 신어 발을 고문하며 산 셈이었다.




매장에는 ASICS, SAUCONY, HOKA, 뉴발란스, On(온 러닝) 이렇게 다섯 개 브랜드의 신발이 갖춰져 있었는데, 슈피터는 온 러닝의 CLOUDFRYER과 HOKA 클리프톤 엣지 러닝화를 추천해주셨다. 내가 아치가 높고, 과내전이라 깔창 가운데 부분이 위로 살짝 올라와 아치를 지지해주는 구조의 러닝화들이었다. 번갈아 신고 걸어보며 발이 편안한지 느껴보았다.




쿠션의 폭신함과 발을 감싸주는 느낌은 온 러닝이 좋았는데, 온 러닝은 검은색에 다소 투박해 보이는 외형이라 부드럽고 가벼운 갑피와 산뜻한 색상을 가진 HOKA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HOKA 러닝화는 전체적으론 흰색에 밑창은 핑크색과 오렌지, 미들창은 하늘색으로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 겉모습과 색상에 더 현혹되는 초보 러너였던 것이다.) 그리고 트레드밀에서 달리며 달릴 때 발이 중립을 유지하는지 확인까지 마쳤다.




HOKA 클리프톤 엣지 가격은 약 17만 원인데, 14만 원을 결재했다. 예약 시 슈 피팅 서비스로 지불한 3만 원을 신발 가격에서 빼줬기 때문이다. 만약 추천받은 신발 구입을 미뤘다가 3개월 내에 이 매장에서 신발을 구매하면 신발 가격에서 슈 피팅 비용 3만 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 최근 두 번째 러닝화도 이곳에서 구입했는데, 내 발 분석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슈 피팅 서비스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전화로 시간 예약을 하고 방문해서 아들 슈피터에게 간단한 상담을 받은 후 러닝화 가격에서 10% 할인을 받고 샀다.




새 러닝화를 사자 빨리 신고 달려보고 싶은 마음에 설레고 설컹거렸다. 무릎 통증 이후로 3주를 쉬었더니 달리기를 시작할 자신이 없었는데, 뛰고 싶은 욕구가 살아났다. 러닝화를 신고 아파트 단지 한편에 섰다. 슈피터는 차 타는 곳까지 친절하게 배웅해주시며 나에게 해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주 조금씩 뛰는 시간을 늘리면 돼요. 30분 동안 운동한다고 생각하고, 걷다가 뛰다가 힘들면 다시 걷다가 하면서 조금씩 뛰는 시간을 늘려보세요.’ 용기를 내서 10분 달리는 것을 목표로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내 발과 신발이 하나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가볍고 탄력 있게 달릴 수 있었고, 지금까지 달리는 삶을 살고 있다.








‘러닝화’는 달리기 중단의 위기에서 나를 구원해주었다. 러닝화를 신고 달린 이후 나는 14개월째 심각한 무릎 통증 없이, 이틀에 한 번씩 건강하게 달리고 있다. 사실 무릎 통증 그 자체보다 이제 겨우 뜨거운 연애를 시작한 달리기와 이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힘들었었다. 하지만 러닝화를 산 이후에는 내 몸의 관절들 잘 보호하며 달린다는 생각에 확실한 만족감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리고 양가 부모님께도 이곳에서 러닝화를 사드렸다. 슈피터의 세심하고 친절한 상담과 신발 추천에 부모님들은 만족해하셨다. 러닝화는 워킹화로도 신을 수 있어 부모님들께서는 사드린 러닝화를 신고 걷고, 운동하시며 무탈한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 신발 그 자체보다 부모님의 ‘발 건강’을 챙기고, 신발을 고르는 ‘생활의 지혜’를 선물한 것 같아 행복하다.




러닝화 한 켤레 사고 소개했을 뿐인데, 나를 돌보고, 주위 사람들도 챙길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쇼핑이 아닌 발 분석과 상담을 통해 자신에게 잘 맞는 러닝화를 골라 오래 행복하게 달리기를 즐겼으면 한다. 나는 오늘도 내 발에 착 감기는 쿠션감 좋은 러닝화를 신고 달리며 ‘단단한 행복’을 쌓아나간다.




내 첫 러닝화 호카오네오네 클리프톤 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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