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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량 Mar 17. 2023

집순이 아줌마는 어떻게 미인대회 모델이 되었을까?

지이정 인생소개서



세번째 소개할 사업가는 온라인셀러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온라인셀러가 될 생각은 없었더라는??!!


그저 딸에게 소심이 엄마가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미인대회에 출전했는데, 그때부터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두 아이 기르느라 결혼 후 직장 한번 다녀본 적 없었던 지이정님은,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나간 미인대회에서 수상을 하고, 자신감을 얻어 다른 미인대회에서 4관왕을 휩쓸더니, 그것이 인연이 되어 라이브커머스 쇼호스트가 되고, 이제 자신의 상품까지 팔게 되었다는!!!


드라마틱 집순이 아줌마의 변신기 시작합니다~

두둥







“난 엄마 닮아서 내성적이고 용기도 없어”
딸의 말에 뚱뚱하고 못생겼던 제가 미인대회에 도전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미인대회 모델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지요.
스스로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글이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이정



오십을 바라보고 이렇게 이뻐도 되는 겁니까? (이 배신감 무엇? ㅋ)



단종. 조선의 여섯 번째 왕이었으며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유배지였던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다.


딸과 함께 역사책을 들여다보고 있자 딸이 내게 물었다.


“엄마, 그럼 단종의 아내는 누구였는데?”


딸의 단순한 질문에 나는 읽고 있던 역사책을 잠시 덮어두었다. 

단종은 익히 알았지만, 단종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뜬금없게도 내 새로운 인생은 이 단순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됐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자 무척이나 슬퍼해 매양 앞산에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설이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죽었다고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졸지에 폐서인이 되었고 노비로 전락한 그녀는 여막에서 동냥을 하고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조의 도움은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급자족하였던 자주적인 여성. 

그녀가 정순왕후이다.


아이의 호기심에 찾아보았던 정순왕후의 기록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절, 그 상황에 자주적인 여성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웠을까.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찾아보듯 정순왕후에 대한 기록을 죽죽 찾아 읽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정순왕후 선발대회가 툭 하니 등장했다.


‘정순왕후의 삶과 뜻을 계승할 수 있는 주체적 이야기를 가진 대한민국의 기혼 여성을 찾습니다.’


“응? 미인대회?”


내성적이고 남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는 내게 미인대회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미지의 대회였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최근에 반장선거를 준비했던 딸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엄마 닮아서 내성적이고 용기도 없어.’


괜한 오기가 생겨났다. 

딸아이가 엄마를 닮아 용기가 없다고 하니, 그럼 용기있는 엄마를 보여주면 아이도 달라질까 싶었다.


나는 몇 번이고 지원서를 썼다 지우며 결국 정순왕후 선발대회에 지원했다. 

그때만 해도 설마 내가 붙을까, 그냥 좋은 도전 했다고 생각하자면서 나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영월군청 문화재재단에서 본선 진출자선발 합격 문자가 온 것이다. 

막상 합격하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내가 뽑히다니 그리 대단한 대회는 아니구나 싶었다.


‘영월에서나 사람이 오지 그렇게 큰 대회는 아닐 거야’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정순왕후 선발대회에는 전국에서 뽑힌 예쁘고 어린 여자들이 스물다섯 명이나 있었다.

어떻게 나이도 많고 예쁘지 않은 내가 이 사이에 낄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정순왕후 선발대회는 1박 2일 사전 워크숍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집을 떠나면서도 아이들, 남편의 끼니 걱정이 앞섰다. 

내가 없으면 분명히 집이 난장판이 될 텐데, 어떡하지, 괜히 대회를 나간다고 했나 후회도 됐다.


그런데 막상 홀로 영월에 오니 그런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신나기만 했다. 

집에서 밥만 하던 사람인데 영월에 오니 너무 신이 났다. 

이렇게 좋은 구경에, 홀로 밥을 먹고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화장이랑 예쁜 머리를 하고 사진까지 찍으니 미인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입상을 하겠나 생각했던 터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어리고 예쁜 여자들을 이기고 내가 상을 탈 거라는 욕심은 애초에 접어둔지 오래였다.


“정순왕후 명예의 동상, 4등은 지이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서는 뚱뚱하고 못생긴 엄마였던 내가 당당히 4등을 차지하다니!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딸아이의 시선이 달라졌다. 

나도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나는 대회에서 인연이 된 김수정 협회장님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끼가 있어, 이제 앞으로 시니어 모델이 대세로 떠오를 거야. 그러니까 이정아, 너도 함께했으면 좋겠어.”


사실 모델이란 것은 내게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대학생 시절, 우연히 얻은 기회를 통해 잡지 모델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모델 일을 계속할지, 취직을 해야 할지 갈등의 순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충고 몇 마디를 해주었다.


“이정아, 너는 끼가 없어.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연예인 한다고 고생하지 말고 그냥 회사 다니는 게 낫지 않겠니?”


그때 엄마의 충고는 내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내가 끼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예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 말대로 은행에 취직했고 평범하게 결혼을 했다. 

아이 둘을 낳고 나니 더는 회사에 다닐 수 없었다. 

큰애가 하루에도 20~30통씩 전화를 하니 떼어놓고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전업주부가 되어 애 둘을 키우며 살았다. 

곧잘 토하는 아기를 키우다 보니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머리는 대충 묶고 다니는 게 편했다. 

운동을 하는 것도 사치였다. 


움직이지 않고 집에 있다보니 체중은 65kg까지 늘어났다.

애 둘을 키운다는 건 축복이기도 했지만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우울증이 와서 병원에 다닐 정도로 힘들어했지만, 남편은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 좀 편해질 테니 참으라고 했다.


나는 정순왕후 선발대회에서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래, 나도 모델 해보지 뭐! 못할 거 없잖아?


그때부터 나는 식단과 운동을 병행하면서 다이어트를 했다. 

65kg였던 몸무게가 52kg까지 빠졌다. 

1,500명이 참여한 한복대회에 나가 3등을 했고 시니어 모델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자 나날이 활력이 생기고 있었다. 

웃는 날이 많아졌고 무슨 일을 해도 자신감이 붙었다. 

그런데 내게 꿈을 심어준 김수정 협회장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너 라이브 커머스라고 아니?”


그날 나는 라이브 커머스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라이브 커머스는 채팅으로 소비자와 소통하면서 상품을 소개하는 스트리밍 방송인데, 대개 네이버, 카카오 등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을 통해 이루어진다.


라이브 커머스의 큰 특징은 상호 소통방식이다.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이용자들은 채팅을 통해 진행자, 혹은 다른 구매자와 실시간 소통할 수 있다. 

상품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여 비대면 온라인 쇼핑의 단점을 보완하였다. 

단순한 쇼핑 이상의 문화로 주목받고 있는 게 라이브 커머스이다.


김수정 협회장님은 내게 라이브 커머스의 쇼호스트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방송에 나가 멘트까지 하고 상품을 팔아야 한다니 처음에는 선뜻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게 내게 또 다른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도전하지 않는다면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언니, 저 해볼게요. 쇼호스트.”


그렇게 쇼호스트로서 처음 방송했던 것은 모 제약회사의 유산균 제품이었다. 

제약회사의 회의실에서 사장님, 부장님, 대리님 두 명까지 총 네 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간중간 고객들과 소통하고 퀴즈도 내야 했다.


그야말로 머리가 하얘졌다. 

말은 하고 있었지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나의 첫 라이브 커머스는 엉망으로 끝이 났다.


방송이 끝나고 매출표를 보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첫 매출은 백만 원이었다. 

통상 삼백만 원 정도 매출이 나니 반도 안 되는 매출을 기록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하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라이브커머스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준비하고 쇼호스트가 된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채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만큼 절박했다. 

혹시 나로 인해 대화제약과의 연이 끊어지고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피해를 볼까봐 두려웠다.


라이브 커머스는 생각보다 더 복잡한 시장이었다. 

잘 팔리는 시간대와 요일이 있었고 무수한 셀링 포인트가 있었다. 

라이브 커머스가 유명하지 않다보니 나는 무식하게 공부를 해야 했다. 

책만 스무 권을 사서 거의 책에 파묻히다시피 공부를 했다. 그 중 폴프랑 회사의 안은재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준비된 자세로 방송에 들어가라.’


그 말인즉슨 다시보기가 없는 홈쇼핑과 달리 라이브 커머스는 다시보기가 가능하므로 첫 시작부터 준비된 자세로 방송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고객이 다시보기로 화장품 방송을 본다고 생각해보자. 

방송을 켰더니 화장품을 세팅하고 있고 쇼호스트는 사람들이 더 들어오면 방송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고객은 방송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모여야지 방송을 시작하는 쇼호스트도 있다. 

하지만 한 명도 고객이니 우리는 고객이 한 명일지라도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런 귀한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다음 방송에서는 공부한 노력이 빛을 발했고 나는 유산균, 마스크, 의류부터 시작해서 100건이 넘는 방송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작년 12월부터는 직접 채널을 만들어서 의류를 팔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립, 네이버, 쿠팡에서 라이브 커머스를 진행했지만 현재는 제일 조회수가 잘 나오는 한 곳에서만 라이브 커머스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작년 4월, 나는 파워등급이 되었다. 

쇼호스트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내 힘으로 일궈낸 결과였다. 

남들한테는 별게 아닐 수 있겠지만, 그날 나는 너무 뿌듯한 마음에 가족들에게 밥을 샀다. 

이 기쁜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가족들은 파워등급이 뭔지도 모르지만 나의 노동력이 돈으로 환산된다는 게 감동이었다.



못생기고 뚱뚱한 엄마가 모델이 되었다.


아이라인도 그릴 줄 모르던 사람이 메이크업 아티스트 자격증을 따고 헤어를 배웠다.


매일 목이 늘어진 티셔츠만 입던 사람이 정말 모델처럼 옷을 입으니 딸들은 우리 엄마가 제일 멋있다고 한다. 

딸들은 요즘 내가 걱정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집에서 누워만 있었는데 지금은 늘 바쁘게 일하니 멋지기도 하지만 건강이 걱정이라고 했다.


아직 많은 시니어들이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는다면 인생 2막은 절대 펼쳐지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말자, 도전은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지이정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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