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27. vs. 성남 @수원월드컵경기장
날씨가 좋아지니 경기장을 찾는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봄이 갑자기 오는 게 아니라 여전히 냉기를 품은 순간들이 남아있어서 따스한 햇살이 더 반가운 것 같다. 벚꽃은 사라졌지만 그 외의 다른 꽃들이 색상을 뽐내는 시기라 경기장 주변을 돌아다니는 일이 작은 여행이 되었다.
성남이 많이 달라졌다. 올시즌 경기를 져본 적이 없다. 수원은 홈에서 아직 져본 적이 없다. 무승부가 돼서 각자의 기록이 유지되기보다는 어느 한쪽의 기록이 깨어지길 바랐다. 밍밍한 기분은 때론 비참한 기분보다도 못한 경우가 있으니.
전반전은 팽팽한 기싸움으로 재미가 없었다. 슈팅이 몇 번 나오지도 않았다. 파울리뇨가 없어서 그런지 외인들의 플레이도 그다지 눈에 띄지 못했다. 내가 N석에 왔기에 눈앞에서 골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가.
그랬다. 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김지현의 골이 터졌다. 청백적 우산 퍼포먼스 중이라 아직 경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시간에 골이 터졌다. 어떻게 들어간 건지 우산 때문에 보지도 못했다. 골을 넣은 이가 김지현이라는 사실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골맛에 익숙해지는 선수가 많아져야 한다.
무패의 성남에게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N석이 끓어올랐다. 승리의 기운이 퍼지자 '청백적의 챔피언' 도중 모두가 앉았다가 일어나는 퍼포먼스도 진행되었다. 그 뒤에 일어날 상황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기쁨을 만끽했다.
끓었던 분위기는 십 분을 넘기지 못했다. 성남 후이즈의 동점골이 터졌다. 크로스가 너무 쉽게 올라왔고 잘라 들어가던 성남 공격수의 무빙은 페이크 효과로 작용했다. 후이즈는 수비수를 등지고도 한 번의 찬스를 정확한 골로 연결시켰다.
다운된 분위기는 후이즈의 추가골로 얼음장이 되었다. 2분 만에 같은 선수에게 골을 허용했다. 먼 거리에서의 크로스가 정확히 후이즈에게 배달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성남이 앞서갔다. 기록이 깨지게 될 주체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수원은 총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대부분의 시도는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실마리를 푼 선수는 막내 박승수였다. 특유의 스피드와 방향전환 스킬로 상대 수비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유리한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어냈다. 이 경기의 서사를 뒤바꾸게 만든 프리킥이었다.
이규성 선수의 킥은 거의 골키퍼 정면으로 날아갔다. 그때 성남 수비수와 골키퍼의 충돌이 있었다. 흘러나온 공을 권완규가 빈 골문을 향해 발을 갖다 댔으나 골대를 맞고 나왔다. 여러 명의 선수가 쓰러졌고 경기는 중단되었다.
부상자들을 수습한 이후 심판이 갑자기 VAR을 보러 갔다. Red Card에 대한 판독이었다. 성남 선수들이 많이 다친 상황이었기에 수원 선수에 관한 판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판독을 마친 심판의 손은 골문을 찍었다. 수원의 PK 찬스가 주어졌다. 권완규의 유니폼을 잡아당긴 성남 베니시오는 레드카드를 받고 즉각 퇴장됐다.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살얼음이 쌓이던 N석은 다시 열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키커는 일류첸코였고, 저렇게 쉽게 넣어도 되나 의아할 정도로 안전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스코어 2:2, 남은 시간 10분.
수적 열세의 성남은 추가골을 내주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수비했다.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랐을 테지만 부상 선수로 중단된 시간이 길었던 터라 후반 추가시간이 무려 16분이나 주어졌다. 16이라는 숫자가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수원의 공격은 더 거세어졌다. 중간에서 공을 가로챈 이규성이 박승수에 넘긴 공이 성남 수비수를 맞고 다시 이규성에게 도착했다. 이규성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급할 필요가 없었던 이규성은 슈팅하기에 좋은 위치에 툭 쳐놓고 오른발 강슛을 날렸다. 골문 구석에 꽂히는 역전골이 터졌고 관중석은 함성으로 폭발했다.
극적인 서사는 이렇게 단 한 번의 순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성남 문전에서의 혼돈 상황이 스코어와 수적 양상을 바꿔 놓았다. 동점골의 불씨가 되었던 그 프리킥을 찬 선수는 이규성이었고, 역전골을 넣은 선수도 이규성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드라마틱했다.
기록 행진을 유지한 팀은 수원이 되었고, 성남은 올시즌 첫 패배를 떠안아야 했다. 선수 부상이 많아 출혈이 큰 원정 경기를 치른 성남은 이후의 경기에 대한 걱정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래도 달라진 경기력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두 팀 모두 치열하게 싸워줘서 축구팬으로서 흥분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진짜 봄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