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의 부담을 이겨낼 수 있는 힘

2026.2.28. vs. 서울E @수원월드컵경기장

by nasanasu


작년 12월 7일 제주도에서 체험한 처참하고 허무한 감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이후 이정효 감독이 선임되면서 무너질 수도 있었던 의지가 되살아났고 N석 시즌권 매진 등 이번 시즌의 기대감은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 수원팬 누구나 이정효라는 거센 바람을 타고 홈 개막전에서 가뿐히 승리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대나 예상이 아니라 당위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모든 부담은 피치 위에서 실행할 선수들보다도 이정효라는 개인이 짊어진 크기가 가장 거대할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담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경기 시간 세 시간 반 전에 빅버드 앞에 다다랐는데도 주차장으로 향한 차량의 도열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몇 분 동안 전혀 전진하는 모습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구가 하나라도 한 대씩이라도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길바닥에서 한 시간을 내버린 뒤에야 주차장에 진입했고 내가 소중한 한 시간을 빼앗긴 원인을 알게 되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주차비를 받느라 결제하는 곳에서 정체를 만들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이 결제를 하고 있으니 정체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서있는 다수의 보조인원들 모습이 저 큰길에서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짜는 다수의 운전자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평화로웠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운영할 수가 있을까. 전적으로 저 인원들의 리더의 문제이다. 이용자의 입장에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 그 리더가 누군지 궁금하다. 이러니 이 나라에 어이없는 피해자와 사고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주차장에서의 그 더러운 기분을 빨리 잊으려 노력해야 했다. 정작 중요한 사안에 더 집중해야 했으니까. 빅버드의 모든 구역마다 관중들이 앉아 있었고 잔디 색깔이 누르스름한 게 약간 생경해 보였다. 라인업이 떴다. 대부분의 주전들이 처음 접하는 선수들이어서 약간 당황스러웠다. 교체선수들 명단이 오히려 익숙한 이름들이어서 반갑기까지 했다.


감독 이름이 소개될 때 가장 큰 함성소리가 들렸다. 선수들이 입장할 때 N석에서 벌인 카드섹션은 그야말로 꽃이었다. 모든 구역에 관중들이 꽉 들어찼고 모든 이의 귀를 압도하는 함성 소리와 N석에 물든 '수원의 꽃'까지. 이 모든 풍경을 이정효 감독이 지켜보고 있다. 짊어지고 있다.


많은 이들의 기대감에 소나기를 퍼붓듯 서울이랜드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주변의 소음이 확 줄어들었고 우리가 익숙하게 경험한 탄식을 들었다. 아직 그대로인 건가. 우리의 단점을 극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건가. 그러다 더 절망적인 감정이 치솟아 이정효로도 안 되는 것인가,라는 우려까지. 그러나 한편으론 실점의 과정을 떠올려봤을 때 수원의 구조적 단점으로 비약시키긴 무리가 있었고 서울이랜드의 공격이 빠르고 정확한 이유가 압도적이었다.


경기장에 하나의 골이 터지면 분위기는 바뀔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수원은 조금씩 이정효의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오른쪽 사이드에서 쉬지 않고 저돌적인 강성진의 플레이는 일관적이었고 어린 나이에도 과감한 푸시를 감행하는 김성주의 패기는 지속적이었다. 수원이 일류첸코에게 바라는 그 모습은 여전히 건제했다. 일류첸코의 가슴 트래핑은 손으로 공을 받아내는 것만큼 안정적이다. 결국 일류첸코의 가슴에서 시작한 볼이 수원삼성의 시즌 첫 골로 연결되었다. 다소 운이 따른 볼의 흐름에서 박현빈이 침착하게 골문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이정효를 쳐다본다. 동점골이 터졌는데 화를 내고 있다. 이날의 목표에 아직 다다르지 않았으니 화가 풀리지 않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수원팬의 감정은 동기화되어 있었다.


경기를 보면서 기존의 수원과 가장 달라졌다고 느낀 부분은 투지와 자신감이었다. 저러다 체력이 소진될까 걱정되었지만 압박이 타이트했고 볼에 대한 집착심도 강했다.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과감히 돌진하는 자신감에 수시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또한 홍정호와 송주훈의 수비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불안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그런 수원의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이 경기의 승리보다도 이 장점의 꾸준한 구현이었다. 매 경기에서 이러한 수준의 플레이가 반복된다면 강팀이라는 결과는 자명한 일이다.


좋은 플레이 속에서도 득점이 나지 않자 감독은 무려 네 명의 선수를 한꺼번에 교체했다. 네 명의 선수가 각자 다른 이유로 교체가 되는 것이었겠지만 네 명이라는 그 스케일이 하나의 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몇 분 되지 않아 교체 멤버들의 뚜렷한 활약으로 역전골이 터졌다. 강현묵의 오른발 슛은 정확도에 좀 더 치중되어 있었고 골키퍼와 수비수 사이의 빈자리로 정확히 빨려 들어갔다. N석의 모든 관중이 기립했고 이정효 감독이 표효했다. 이제 이날의 목표치에 성큼 다가섰다.


경기 막판 서울이랜드의 공격이 매서웠기에 불안함을 놓을 순 없었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수비수들은 관중보다 침착했고 김준홍 키퍼의 볼처리는 안락에 가까웠다. 종료 휘슬이 울렸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그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걸 알기에 커지는 기대를 스스로 억누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흥행의 분위기 속에서 지는 그림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미리 그린 그림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로 생성될 모든 환희와 실망은 이정효 한 사람을 향할 수밖에 없다. 기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 커다란 부담에 그는 맨몸으로 맞섰고 그렸던 그림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해 버렸다. 나는 그의 배짱에 두둑한 점수를 부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