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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Aug 28. 2023

니가 뛰면 내가 줄게, 니가 주면 내가 뛸게

2023.8.27 vs. 광주 @광주축구전용경기장


이번 주 먼저 있었던 강원과 수원FC 모두 승이 없었기 때문에 최하위에서 조금 더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제주전의 승리의 기운이 이어지길 바라는 수원팬들은 일찍부터 원정석의 자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전주성 정도의 거리겠구나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한 시간은 더 가야 하는 거리였다.


버스를 내린 곳 앞에는 광주월드컵경기장이 있었는데 광주축구전용경기장은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햇빛이 갑자기 튀어나올 거 같기도 한 애매한 날씨였다. 내 기분도 애매했다. 이길 것 같지 않은 기분이 살짝 강했지만 이렇게 멀리 왔는데 비기기는 하겠지 하는 희망이 확신 없이 꿈틀댔다.


경로 중간에 롯데 아울렛이 있었는데 앞서 걷던 수원팬이 들어가길래 나도 무심히 들어가 보았다. 광주팬은 몇 명 보이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에 수원팬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원한 곳에서 저녁이나 먹고 갈까 하는 생각에 식당을 둘러봤는데 대부분 대기줄이 길었다. 그냥 경기장에 일찍 들어가서 간단한 음식에 맥주를 마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울렛을 나오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다. 아울렛의 안과 주변에 수원팬들이 너무 많았다. 경기장에서 음식을 먹기에 그다지 뜨거운 날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정석 출입구로 들어가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매점이라고 적힌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음료와 핫바가 들어있는 자판기 한 개만 놓여있었다. 맥주는커녕 생수 하나 먹으려 해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뽑아야 하는 환경이었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아울렛에서 끼니를 때우고 거기서 맥주를 사서 들어왔었구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허기를 견디다가 숙소에 가서 몰아서 먹어야 하는 형편이다.


그렇게 낯선 경기장에 들여놓은 첫 발걸음의 인상이 좋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니 하늘색도 우울했고 잔디의 색채도 친숙하지 않아 그런 불편한 마음이 경기의 결과로도 연결될 것 같았다. 광주팬들도 경기장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빅버드는 정말 괜찮은 곳이구나, 광주엔 다시 올 일이 없겠구나, 혼자 와서 차라리 다행이다, 같은 독백만을 씹었고 어두운 예감은 경기의 결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0:4 최악의 경기를 광주에서 목격했다.


프로라는 자격이 주어진 선수들에게 기본적으로 기대하는 플레이가 있기 마련인데 광주에는 그것이 있었고 수원에는 없었다. 개인의 체력과 스킬을 객관적으로 비교한다면 이런 스코어를 만들 만큼 격차가 크진 않을 것이다. 그 차이는 동등하게 가진 능력들을 분배하고 배치하는 운영력에 달려있다. 어딘가 주눅 든 느낌이 자신감을 감소시켜 운영력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지만 그 운영력은 무수한 연습과 시뮬레이션 훈련에서 비롯되어 공을 터치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다. 공을 잡고 주변의 정황이 먼저 형성되기까지 망설이다가 뭔가를 운영하려다 보니 상대는 반복된 훈련에서 체험했을 익숙한 상황을 마주한 것뿐이었고 그런 상대를 교란시킬 수는 없었다.


이날도 수비들끼리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골키퍼부터 다시 시작하는 공돌리기가 계속되었다.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을 점유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러다 상대의 압박에 어이없이 공을 뺏기는 일이 빈번했다. 수원이 위협 없이 스스로 뒷걸음을 치고 있으니 상대는 더 공격적으로 밀고 올라온다. 실패가 잦아지더라도 전진하는 패스로 밀고 나가야 상대의 골대 앞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 그러지 못하는 것인가...


경기가 끝나고 지난 경기 복기는 하는지, 복기의 내용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아마추어가 지도를 하더라도 매번 똑같은 형태의 취약점을 지적하고 개선할 방법을 찾으려고 아이디어를 끌어모을 것이다. 피치 안에서 그냥 서로 눈치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니가 뛰면 내가 줄게, 아니, 니가 주면 내가 뛸게. 그러는 사이 상대는 진영을 정비하고 자신감 없이 망설이는 수원의 공을 빼앗아 질주한다.


이날은 경기의 패배 외에도 고승범의 부상이라는 악재를 맞아야 했다. 다친 부위가 머리라는 게 상당히 걱정이다. 피치 밖으로 나온 뒤에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누워만 있다가 실려갔다. 고승범이 경기장 밖에서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동안에도 맥없는 플레이는 계속되었고 힘 빠진 팬들은 그야말로 안간힘을 끌어올려 수원을 외쳤다.


이런 경기를 보면서 관중들을 독려해야 하는 일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응원단장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다. 나라면 하기 싫었을 거 같다. 가장 최악의 경기를 목도하면서 다른 때보다 더 힘찬 응원가가 튀어나왔다. 경기가 끝나고 응원단장이 고백을 한다. 다음 경기가 슈퍼매치라 선수들 기죽지 말라고 더 열심히 외쳤다고. 멀리서 온 팬들도 그 생각에 동조하는 환호를 보낸다. 아, 울컥했다.


한 사람씩만 오고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좁은 출입구. 언제든 사고가 날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도 사고가 나서 사람이 몇 명 죽어야 개선을 해줄까. 안전요원이 한 줄로만 지나가시라고 연신 외치고 제지하고 안내한다. 응원단장은 확성기에 대고 구조의 위험성을 공지하고 중간 병목 지점에서 지나갈 사람들의 순서를 정리해 준다. 굳이 밀집에 보탬을 주기 싫어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밀집도가 잦아질 때까지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나쁜 방향으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


광주에 다시 올 수도 있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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