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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Sep 18. 2023

그따위로 축구하려면

2023.9.17 vs. 대구 @수원월드컵경기장


17일 대구전이 있기 전날 강원은 전주성에서 전북에게 승리하며 수원이 다시 꼴찌로 내려앉았다. 강원의 플레이를 보면 수원과 꼴찌를 다투는 팀이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개인 기량이나 스피드면에서 확실히 수원보다는 우위에 있다. 하긴 개인 기량이나 스피드면에서 수원보다 떨어지는 팀을 아직 보지 못했다. 최근의 울산이 그나마 비슷한 수준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전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꼴찌를 탈출할 거라는 이상한 예감은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4시 30분 경기지만 11시 30분쯤 빅버드에 도착했다.


야구를 보러 갈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날 직관을 앞두고 있으면 아침부터 들뜬 마음으로 하루 전체를 맞이한다. 팀의 성적이 안 좋다 보니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여정들이 진정한 직관의 행복을 선사하는 시간이 되는 날이 많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스토어에서 물건을 산 후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휴식을 취했다. 책을 읽고 사진을 커피를 마시는 그 시간이 매우 평화로웠고 그렇게 정적인 행복 이후에는 빅버드 피치 안의 동적이고 뜨거운 형태의 행복이 예정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감까지 머금고 있었다.


라인업에 김보경이 오랜만에 포함됐다. 그가 초반에 보여준 모습들은 이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한껏 상승시켰었지만 언젠가부터 무기력한 플레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체력과 스피드가 떨어지다 보니 보유한 개인기가 성과로 이어지질 못했다. 카즈키와 고승범이 보인다. 존재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저들이 뛰는데도 지는 경기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기지 못하는 경기리라.


교체 멤버에 이기제와 포포, 뮬황이 보인다. 포포는 왜 이 팀에 있는 건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프로 선수는 경기마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잠재성이 있기에 한 번 기대해 본다. 피지컬 자체는 상당히 위협적이다. 뮬황과 같이 뛴다면 상대 수비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E석에 앉으니 쏟아지는 자외선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지만 느낌이 좋다. 경기가 시작된다.


확실히 대구의 공격 스피드는 수원보다 우위에 있다. 다행히 김주원이 수비의 중심을 잘 잡아줘서 큰 불행은 없었다. 불운이라면 오히려 수원에게 있었다. 안병준의 왼발 슛이 골대를 향해 굴러가는 동안 수원팬들은 골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공은 야속하게도 골대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갔다. 이 골이 들어갔더라면...... 수원과 안병준에게는 완전히 다른 하루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득점 없이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됐다. 이기제, 포포, 뮬황이 투입되었다. 후반 11분 대구의 벨톨라가 퇴장을 당했다. 현장에 있으니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수원에게는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팬들은 환호하는 와중에도 이런 상황에서 이기지 못했던 경기들을 상기한다. 꼴찌팀 수원에게 완벽하게 유리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간다. 별다른 기회를 만들지도 못한다. 오히려 막판으로 갈수록 대구의 날카로운 공격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거 뭔가 좀 안 좋게 흘러갈 것 같다.


이날 수원 선수 중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수비수 이규석. K리그 첫 출전에 풀타임을 뛰었다. 그는 수원의 좌측을 파고드는 대구의 바셀루스를 전담 마크했다. 서로 몸이 부딪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충돌로 넘어져 있기도 했다. 첫 출전 치고는 빠른 공격수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결국 체력 때문이었을까. 인져리 타임 6분 바셀루는 경기 초반의 스피드에서 전혀 줄어들지 않은 속도를 보였고 이규석을 제치고 양형모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극장골. 대구 응원석은 함성으로 폭발했다. 수원은 이러다 비기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 보다 더 지옥 같은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경기를 지다니......


선수들이 끝인사를 할 때 N석에서는 선수들을 비난하는 응원가가 울렸다. '이따위로 축구하려면, 나가 xxx'... 선수들은 시종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선수들이 열심히 뛰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경기뿐만 아니라 결과가 처참했던 다른 경기들에서도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열심히 하는 것과 결과가 좋은 것이 서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열심히만 할 뿐 소모적으로 증발되는 에너지들이 더 많았다. 경기장이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 더 열심히 뛰어야 할 때다. 뛰지 못한다면 지난 경기라도 수십 번 쳐다봤으면 좋겠다. 수원의 플레이가 얼마나 단조롭고 상대방이 대응하기 수월한 수준인지 깨달았으면 좋겠다. 전략의 변화 없는 노력은 자신감만 추락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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