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사나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sanasu Nov 02. 2023

일이 일어나는 순서에 따라

2023.10.29 vs. 대전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원이 다이렉트 강등을 피할 수 없다면 이제 1부 리그에서의 경기는 단 2경기뿐이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일요일 오전에 전주에서 일정을 갖고도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 시간을 운전해 수원에 도착했다. 경기 시간에 늦어서 빠르게 걷던 와중에도 가로수의 풍경이 이뻐서 잠시 발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피치를 응시하고 있는 시간에 경기장에 들어서면 홈팬임에도 이방인이 된 듯한 묘한 기분이다. 햇살이 따가워서 E석에 앉은 사람들 일부는 머플러나 박스 조각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라인업에 이종성이 있어서 야릇한 기대감을 갖게 했고 이기제는 이날도 명단에 없어서 의아했다. 경기하기는 아주 좋은 날씨다.


대전은 워낙 압박이 강하고 공격력도 좋아서 비기면 성공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김주찬이 논스톱 슛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그야말로 수원의 소년 가장이다. 골은 넣은 후에도 파이팅이 넘쳤고 E석의 팬들을 보며 응원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코스티의 속도감 있는 헤딩슛으로 2:0을 만든다. 뜻밖의 스코어다. 이겼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의 플레이는 역대급으로 훌륭했다. 대전의 압박이 들어오기 전에 빠른 템포로 패스를 이어가는 전략이 주요했다. 이종성을 볼 배급력도 정확했고 선수들 간의 호흡도 어긋나지 않았다.


전반전이 끝나니 모두들 카니발을 생각한다. 인내하며 챙겼던 응원이 이제 보상을 받는 느낌이다. 이제 강원을 제치고 11위로 올라갈 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여전히 축구하기에 좋은 날씨다.


후반에도 전반전의 좋은 흐름이 이어졌다. 아쉽게 골문을 벗어나는 횟수가 늘어간다. 카즈키와 아코스티가 빠지고 바사니와 김경중이 들어온다. 교체 투입된 이들의 초반 플레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바사니에게 찾아온 1:1 상황. 바사니가 침착하게 칩슛을 날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 쪽으로 날아갔는데 스핀이 걸렸는지 오른 골대 바깥쪽으로 빠져나간다. 아, 너무나 아까운 순간. 3:0은 승리를 확신하기에 더없이 안전한 스코어인데 그 안전한 기회를 놓쳤다는 반대 감정으로 슬슬 불안감이 형성된다.


원정석에서 수원 강등을 외치는 순간 대전의 추격골이 터진다. 이때까지도 전반에 2골의 터지길 잘했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대전의 공격은 더 매서워지고 추가 시간 7분이 주어지자 수원 팬들은 더 강력한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수원은 수비수 2명을 교체 투입하면서 방어에 집중하는 태세다. 그러나 대전의 공격은 지칠 줄을 모르고 측면과 중앙을 위협한다. 그리고 3분을 남기고 동점골이 터진다. 대전 마사의 이 골에 일부 수원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기장을 떠난다. 탄식과 한숨이 이어진다. 햇빛은 여전히 따가워 머리를 가린 손들이 저려온다. 씁쓸한 통증들.


수원강등과, 너희에겐 강등뿐이다라는 소리가 빅버드에 울려 퍼진다. 인간은 누군가를 조롱하려고 마음먹을 때 창의성이 돋보인다. 대전의 그런 조롱은 팬들은 물론 피치 위의 선수들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경기는 그대로 끝난다. 역전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이게 올시즌 수원의 일관적인 모습이었다. 막판이 위험하단 걸 알면서 막아내지 못한다. 수비수를 보강하는 것과 반대로 더 공격적으로 나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성공 확률이 높을지 나로서도 예측이 어렵다. 나태해지거나 끈기를 잃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이가 없을 뿐이다. 대전이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절실하게 잘했다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2:2 무승부이다. 지지 않았고 승점도 1점을 챙겼다. 그러나 대역전패를 당한 기분이다. 골의 순서가 반대였다면, 대전 홈에서 그랬었듯이 수원이 2골을 먼저 먹고 2골을 따라간 거라면 지금과는 정반대의 감정 상태에 있을 것이다. 같은 1점 인데도 골의 순서에 따라 선수들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수치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스포츠는 사건의 배열이 더 중요한 분야이다.


이제 홈경기는 단 한 번 남았다. 그 경기 전에 강등이 확정될 수도 있다. 어떤 상태이든 그 마지막 경기는 팬들에게 고통스러울 것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의 한복판에 서있을지도 모른다. 매 순간 다 느끼리라. 고통도 자극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걸 희망고문이라고 해야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