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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Nov 29. 2023

위기는 정신을 응집시킨다

2023.11.25 vs. 서울 @서울월드컵경기장


지난 수원FC 원정은 집에서 티브이로 관람을 했는데 진짜 역대급 역전승이라 말할 수 있겠다. 전반 초반 카즈키가 퇴장당했을 때 적어도 3점 차이로 대패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무엇이 그 경기를 뒤집을 수 있게 만들었을까. 스포츠는 바로 그런 예외성 때문에 팬들의 시선을 붙잡아둔다. 그러나 이제 더 큰 벽이 앞에 놓여있다. 올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슈퍼매치. 그것도 상암에서 펼쳐진다. 강원이 이기고 수원이 지면 수원의 강등이 확정될 수도 있는 날.


1층 원정석은 일찌감치 매진이었고 2층에서 수원팬들이 가득 들어찰 예정이었다. 추운 날씨도 강등이 확정될 수 있는 현장을 찾아오려는 마음을 막지 못했다. 경기 전부터 홈팬들의 강등콜을 들어야 했지만 이제 그런 조롱은 고민거리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겨내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수원팬들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비장했고 불확실한 표정 속에는 끊지 못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선수도 팬들도 반다도 이제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카즈키가 없다. 이기제도 없다. 그동안 잇몸이었던 이름들의 헌신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종성이 있다. 노란 카드만 조심한다면 그의 저돌성은 서울을 상대하기 최적의 인물이다. 3명의 외국인인 포포, 바사니, 아코스티가 선발이다. 그동안 무수하게 비난했던 선수들이지만 최근 그들의 실수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전반전에 두 골 이상만 내주지 않는다면 승산이 있다고 예견해 본다.


기성용을 필두로 전개되는 서울의 공격은 세밀하고 위협적이었다. 김주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수원의 수비가 조금 더 우세했다. 서울은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수원의 포포는 골 소유 시간을 점차 늘려갔고 수비가 연쇄적으로 붙으면서 좌우측에 공간이 생겼다. 바사니와 아코스티는 유효슈팅을 축적했다. 손호준의 세련된 플레이도 수비 라인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축이 되었다. 0:0으로 전반전이 끝났지만 경기 내용에서는 수원이 앞섰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원정석은 청백적의 축제가 시작됐다. 산개되어 펼쳐진 우산의 향연으로 경기장이 보이지 않았다. 흩뿌려지는 색종이와의 조합으로 평화로운 장관이 펼쳐졌고 혹시 그 사이 골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틈틈이 양형모의 위치를 체크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관을 전체의 풍경으로 관람하는 자리가 좋을지 아니면 그 안에서 장관의 구성원이 되기를 자처하는 게 좋을지 늘 고민이다. 지금의 수원 상황에서는 구성원으로서 힘을 보태는 게 옳은 자세라고 판단해 본다.


수원의 공격이 조금씩 날카로워진다. 바사니와 포포에게 몇 차례 기회가 왔지만 아쉽게 놓쳐 버렸다. 뮬리치와 김주찬이 가세한다. 그리고 결과가 만들어진다. 중앙에서 자신감 있게 드리블을 치며 왼발로 슛을 성공시킨 주인공은 바사니였다. 바사니를 빼야 한다고 소리친 적이 많았던 나는 그 골에 굴복하여 바사니에게 축복의 환호를 외친다. 원정석의 모든 이들이 양팔을 뻗으며 흥분했다. 설마 했던 마음이 더 많았으리라. 선제골을 넣을 거라고 기대한 수원팬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 후로도 몇 번의 득점 기회가 있었지만 이 긴장 상태를 오래 끌고 가려는 신의 술책인지 추가 득점은 터지지 않았다. 그 대신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기성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팔로세비치로 이어지면서 고승범을 둘러싼 아수라장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코치가 고승범을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후에 그는 퇴장을 당했으나 반성하는 표정은 없었다. 나는 그가 축구계에서 영원히 퇴출되길 바란다. 내가 고승범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쫓아가 면상을 짓밟았겠지만 다음 경기까지 생각한 고승범은 그 수난을 묵묵히 정신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경기시간은 백 분을 넘겼고, 막판에 서울이 동점골을 넣고 강등콜이 울려 퍼지는 모습을 배제할 수 없었지만 결국 수원이 이겼다. 선수와 팬들의 대합작품이었다. 참 공교로운 상황이다. 지금 수원에 가장 중요한 선수는 카즈키인데 카즈키가 빠진 두 경기를 내리 이겨냈다. 위기가 정신을 응집시켰다는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제 진짜 마지막 한 판을 남겨 두고 있다. 경우의 수를 따지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다. 무조건 이겨내야 한다. 플레이오프에서 강등을 당하더라도 다이렉트 강등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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