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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Feb 17. 2024

그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릴리 킹 <작가와 연인들>


그 모든 건 단지 엄마가 그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호하지 않으면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변명을 한다. 그리고 밥을 먹고 똥을 싼다. 엄마가 잘 해내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을 하면서. 엄마의 병이 그것들을 못하게 만들었겠지만 그것들을 못했기 때문에 결국 엄마는 죽었다. 내가 병을 고칠 수는 없었어도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일은 도와줄 수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던 나는 그것들을 못해내는 사람의 불편함 속에 깊숙이 빠져들지 못했다.  엄마가 죽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얼마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같이 그 고통에 대해 생각하며 밥을 먹고 똥을 싼다.



소설의 이 부분을 읽다가 엄마의 양치질을 도와주던 장면이 생각났다. 같거나 유사한 장면이 아니지만 엄마라는 단어를 만나면 과거의 어떤 장면들이 맥락 없이 날아온다. 엄마가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 내가 엄마를 보러 갔던 게 일주일에 한 번인지 이주일에 한 번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엄마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얼마 만에 왔는지,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지를. 그곳에 있는 엄마를 보면 한 없이 불쌍하고 미안해져서 더 자주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요양원을 나오지만 만만치 않은 일상을 살다 보면 그곳에 가려고 마음먹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그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기 때문에.

굉장히 맛없어 보이는 요양원의 저녁 식사가 나오면 나는 엄마 앞에 앉아서 엄마가 밥을 먹는 걸 지켜본다. 밥에 간장을 덜어주기도 하고 백김치를 찢어 수저 위에 올려주기도 하고 물을 먹여 드리기도 한다. 그러나  엄마는 씹는 것도 삼키는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음식이 혀를 지나칠 때 맛이라도 느낀다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못한 것 같다. '그만 먹을래'와 '조금만 더 먹어'가 몇 번 반복되다가 '이제 못 먹겠어'가 나오면 식사는 끝난다. 곧이어 엄마는 한 무더기의 약을 먹는다. 한꺼번에 삼킬 수가 없어 알약 하나씩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신다. 양치질을 하기 위해 칫솔과 물컵과 큰 대접을 준비한다. 양치가 끝나면 나는 도구들을 닦고 원래의 자리에 놓는다. 엄마는 눕는다. 이제 다 됐으니 고생했다며 집에 가라고 한다. 잠들고 싶어 하는 엄마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고 요양원을 나온다.

엄마가 맛도 없고 고통뿐인 행위 속에서도 밥을 먹었던 것과 소화를 시킬 겨를도 없이 양치질을 하고 바로 누우셨던 건 나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끝내야 내가 엄마를 위해 뭔가를 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홀가분하게 일상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엄마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밥을 씹고 천천히 물을 마시고 천천히 소화를 시키다가 천천히 양치를 하고 천천히 눕고 싶으셨을 거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손을 더 잡고 내 얼굴을 더 만지고 싶으셨을 거다. 좀 더 같이 있어 달라고, 자주 좀 와달라고 말하고 싶으셨을 거다. 엄마는 자신이 나에게 짐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내가 편한 마음으로 빨리 돌아가게 하는 일에만 집중하셨다. 엄마가 그랬다는 걸 나는 엄마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몸이 불편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이런 상태가 해소되는 걸 한 번이라도 느껴보지 못하고 결국 스러진 사람. 엄마의 머릿속에 출렁거렸을 생각과 감각들을 떠올리면 지금 내가 속한 일상들이 무의미해진다. 무엇으로도 회복되지 못할 만큼 나는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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