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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May 03. 2024

비록 뭉개지고 흐려지더라도

2023.7.21


정확하게 맞추지 않기에 잘 해낼 수 있는 것들 중엔 사진의 아웃포커싱이 있다. 보케라고도 부르는 이 방법은 피사체에 정확히 포커싱 하지 않아 흐릿하게 표현하는 기능이다. 포커싱 됐을 땐 만들어지지 않는 동그란 빛의 덩어리가 환상적이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사진을 보니 안경을 쓰지 않아 디포커스 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을 표현했던 다자이오사무의 소설 속 문장이 생각난다.


안경을 걸치지 않고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참 좋다. 풍경 전체가 뿌옇게 보여 꿈처럼, 아니면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멋있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큼직한 것만이, 선명한 강한 색과 볕살만이 눈 안에 들어온다.  - <여학생> p25


너무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너무나 끔찍한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 차마 있는 그대로 쳐다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경우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장면이라면 적당히 흐릿하고 뭉개진 시선을 장착할 필요가 있다.


사진 속에는 여러 개의 동그란 광원들이 보인다. 집단 속의 개인처럼 제각각 다른 색상과 명암을 지니고 있다. 전구가 만든 빛일 수 있고 디지털 기계가 뿜어내는 빛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테두리가 동그랗고 선명한 위쪽 빛들 아래에 형체가 무너지고 조금 더 흐릿한 빛의 흔적들이 보인다. 이것들은 어디서 나오는 빛의 덩어리들일까.







이 사진은 어느 여름밤의 성산대교를 찍은 풍경이다. 야간에는 오토포커스 기능이 단 번에 동작하지 않아 종종 저런 아웃포커스로 촬영되곤 한다. 원래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의 라이트가 동그란 보케를 만들어냈고 강물에 반사된 빛들이 뭉개진 빛의 흔적을 만들어냈다. 초승달이 중간에 떠있어 풍경이 완성된 듯한 안정감을 준다. 이렇듯 어떤 풍경들은 포커스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2023.7.21 성산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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