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는 성찰
엄마,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
엄마와 아빠는 내가 대학교 때 이혼했다. 엄마는 거의 평생을, 돈이라는 현실인지
상상인지 처리하기 골치 아픈 산물과 씨름했다. 아빠와 사이가 별로였던 것에 돈이 한몫했다.
돈을 추구하는 열심은 아빠보다는 엄마 쪽이 컸다. 그런 이유로 내가 돈을 쉬이 써버리거나
버는 일에 나태한 모습을 보일 때는 그게 아빠처럼 보였는지, 근심 섞인 목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20대에는 그런 엄마와 생각이 부딪칠 때가 많았다. 20대와 40대가 한집에 산다는 일의 단점이
종종 드러날 때였다. 집에 대한 생각, 직장에 대한 생각, 배우자에 대한 생각, 노후에 대한 생각에
걸쳐 돈은 어느 곳 하나 빼놓고는 생각을 할 수 없는 닳고 닳은 꼬랑내 나는 녀석이었다.
tv에서 꽤 큰 집과 거기 사는 사람들의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한창 백수생활을 하는 중이었고 엄마도 무엇이든 한창 열심히 할 때였는데,
큰 집을 가진 여유로운 사람들이 부럽고 언제쯤 큰돈을 모을 수 있는지 고민하며 tv 켜기 1분 전과는
사뭇 다른 감정상태를 오가며 감정을 분출하는 엄마를 보고 나는 이렇게 질문했다.
엄마, 그러면 우리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라는 질문에 엄마가 한창 혈기왕성하던
시절 입버릇처럼 하던 말로 더 잘 사는 사람을 봐야지 못 사는 사람 타령만 한다는 둥 지아빠를
닮았다며, 손 없이 때린 기억이 난다.
제 아빠를 닮았다는 꾸짖음은 자식으로 하여금 반성과 성찰을 짜내어 엄마쪽에서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써먹기 좋은 엄마표 경제 논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지점은 그렇게 잔소리를 듣고 자랐어도 여전히 물음표가 많은 사람으로
자랐다는 점이다.
엄마 말처럼 나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아직도 집 한 칸 없는 걸까?
나의 시간은 남들의 시간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각 연령대에 따라 해야 하는 일과 성취해야 하는
목적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기대수명대로 80대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엄마는 교회에 다니며 기도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반찬을 나눈다. 돈을 모으기만 잘하지,
이리 내주고 저리 내주기를 반복한다. 내가 엄마보다 착해서가 아니라 엄마 시대에 십시일반 진심 어린
동정심으로 자기 것을 거두어 남을 도와주었던 형태에서, 동등하게 태어난 한 사람이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과 비슷한 가치를 누리며 사는 형태로의 가치관의 이동을 바라는 것이다.
20대 시절, 막연히 나보다 무엇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동정하던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보다 무엇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을 기준 없이 동경하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 같다.
거창할 것 없이 평등은, 핸디캡 스타트일 수 있다. 엄마가 평등한 세상에서 균형있는 한창때를 보냈더라면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