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저장
심심해서 영화를 보겠다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 같아요.
나중에 봐야지 생각에 저장해 두었던 영화들이 많은데, 마음은 시시각각 바뀌어서 꺼내 보지 못하고 저장고에 쌓이기만 합니다. 영화를 보겠다는 계획, 소설을 읽겠다는 계획, 시를 읽겠다는 계획들은 쌓이다 잊혀요.
불현듯 마음이 무르익으면 잊히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역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전 그렇게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어요.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주제하고 전혀 상관도 없고 감독은 의도했을 것 같지도 않은 소품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혹시 나는 아주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했어요.
마당에 새장이 세 개 걸려 있었고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중요한 무대가 되는 집이 보였어요.
1970년대 멕시코 가옥이었어요. 영화의 주제상 등장인물들이 사는 1970년대의 중산층이 사는 멕시코 가정을 보여주는 일은 중요한 것 같았습니다. 영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문제 삼을 일은 바로, 새장을 굳이 만들어 새를 애완화 시키는 일은 인간만이 하는 유일한 일이고 그렇다면
집도 새장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옮겨 진행되어 가는 과정이었어요.
그렇지만 허점을 발견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장과 사람의 집.
새집과 사람의 집.
이렇게 비교해야 저울의 크기가 맞겠지요.
의문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새장이든 새집이든 가두어진다는 의미는 남아있었어요.
만약 집이 인간의 삶에 기본값이 아니어도 된다는 전제 아래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럴듯한 이론을 떠나서.
왜 스스로를 가두고 싶어 하는 걸까요.
멀리 여행을 가면 집 생각이 간절히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육체의 연약함과 피로, 오랜 관습들이라는 전제를 거두고서는 별로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의 상상력의 부재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인간에게 연약함이 없었다면......이라는 생각 밖에는요.
영화 <팬텀 스레드>의 말미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는데, 당신이 쓰러지길 원해요 힘없이 나약하게 무방비 상태로 내 도움만 기다리며 그리곤 다시 강해지길 원해요........ 당신은 좀 쉬어야 돼요.
흥미로운 점은, 이 대사는 아내(집)가 남편에게 강제로 연약한 상태에 빠지도록 한 후에 내뱉는 대사라는 점입니다. 한편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에서의 집은, 집주인의 신경질적인 도착증에서 오는 심리와 집의 풍경이 은유적인 관계로 나타납니다.
새장과 집.
이런 비교의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새장 안에 있던 흰색 새들의 소리를 떠올려 듣습니다.
새장 안에 있던 새들의 색깔이 흰색이어서 좋았다는 기억의 집을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