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조부전 손자전(祖父傳 孫子傳)
-양허(養虛) 김재행 (金載行 )
병술년(1766년)사행에 담헌 홍대용과 양허 김재행이 동행했다. 양허는 문장에 뛰어난 호탕한 성격의 49세 선비였다. 그는 청음 김상헌의 족손이다. ‘족손’이라는 말은 유복친 곧 상복을 입는 가까운 친척은 아니라는 뜻이다. 담헌과 양허는 유람하는 즈음에 마음속으로 천하의 기이한 선비들을 몰래 구하고 있었는데 한참 뒤에 항주의 선비 세 명을 얻어 교우를 맺었다. 항주의 선비란 철교 엄성과 소음 육비, 그리고 난공 반정균이다. 통성명을 할 때였다. 그들이 청음을 아느냐고 양허에게 물었다. 양허는 청음이 집안의 할아버지라고 대답한다. 난공이 깜짝 놀라 한참을 감탄하더니 <감구집>을 꺼내어 준다. 그 책에 청음의 시가 실려 있다. 그는 청음의 시에 차운하여 쓴 자신의 시도 이별 예물로 주었다.
소음은 벼슬을 마다하고 호수와 동산이 있는 곳에서 맑고 한가하게 기거하며 마음으로 밭을 갈고 붓으로 옷감을 짠다. 담헌을 형이라고, 양허를 아우라고 부르며 양허에게 주는 시에서 소음은 이별의 수심이 너무 많아 술 한 잔도 다 마실 수 없다고 말한다. 술을 마신 슬픔이 눈물로 변해 비처럼 옷을 적실까 봐 그런단다. 연애도 아닌데 남정네들끼리 너무 감상적이지 않나, 절제하는 버릇이 몸에 밴 선비들이, 낯간지러운 감상(感傷)을 참 잘도 내뱉고 있었다.
그대를 위해 백아절현(伯牙絶絃)하겠다고 쓴(한시에서는 절, 멸, 사 같은 글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말이 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철교가 36세에 죽었다. 그는 담헌이 준 먹을 꺼내어 한참 동안 냄새를 맡고 만지다가 가슴 위에 둔 채로 숨을 거두었다. 담헌과 양허는 철교의 형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그 편지가 공교롭게도 철교의 27개월째 담제를 지내는 저녁에 도착한다. 철교의 형은 담제를 지낼 때 담헌의 뇌문(고인을 애도하는 글)을 읽어 초헌으로 삼고 양허의 뇌문을 읽어 아헌으로 삼았다.
열하일기 3권(180쪽)에 있는 양허의 초상은 『일하제금집』에 있는 초상이다. 엄성이 그렸다는 홍대용의 초상도 나오는 이 책은 조선과 중국에 있는 벗들의 교유를 다룬 책으로 1767년에 초판이, 1770년에 재판이 나왔다. 담헌의 손에는 1778년에야 들어왔다. 이 책을 보며 연암 패밀리가 얼마나 울고 웃으며 추억을 되새겼겠는가. 42세의 연암은 쟤네들이 다녀온 중국에 나도 한번 가고야 말겠다고 얼마나 별렀겠는가. 불과 2년 후면 그곳에 가게 될 것은 예측도 못하고.
난공 반정균은 부인네처럼 정에 약하고 몸짓이 농익어 쉽게 눈물을 짓는다. 그는 담헌이 거문고를 연주하자 눈물을 흘리고 오열한다. 한번 이별한 후에 서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양허의 싯귀-문을 나와 손 잡으니 별빛은 차가워라를 보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이별의 정자에 풀은 석양 밖으로 푸르고/만 리 길 채찍 잡고 홀로 떠날 때로다 를 보면 몇 줄기 눈물을 줄줄 흘린다. 맑고 곱게 민첩하고 참신하게 시를 쓰는 이다.
청음 김상헌은 지하에서 알았을까, 청나라 오랑캐와 자신의 족손인 양허가 백아절현의 우정을 쌓을 줄을. 백아절현이란 거문고 연주자 백아가 거문고의 현을 끊었다는 이야기다. 벗인 종자기가 죽었을 때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이해해 줄 사람이 사라졌음에 슬퍼하여 거문고의 현을 끊는다. 이 우정 이야기에 나는 저절로 청음이 떠오른다. 비록 족조(族祖)이지만 할아버지인 청음의 충절을 존중하여 양허는 오랑캐 벗을 안 만들어야 했을까? 혹은 할아버지와 상관없이 내 시대에 내 세상에서 내 사람들과 함께 내 삶을 부담없이 살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