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許浚, 1539~1615)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한자를 모르고 의학을 모르는 사람도 다 아는 책이 《동의보감》이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면 자기네 음식이 사람의 몸에 좋다며 그 근거로 동의보감을 댄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어린이용 버전도 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삶이 드라마로도 여러 번 나왔다. 이래저래 동의보감은 유명하다. 그런데 이 책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꾸준히 팔렸으며 25권이나 되는 방대한 백과사전인 줄은 잘 모를 것이다. 이거 모르면 간첩이란 말도 동의보감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다. 동의보감은 북한에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연암은 연경의 유리창의 한 서점에서 동의보감 판본을 본다. (중국에서는 1763년에 『동의보감』 초간본이 나왔다) 연암은 그 책을 사고 싶다. 집안에 좋은 의서가 없어 병이 들면 이웃에서 빌려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값 문은(紋銀) 닷 냥이 없다. 섭섭하지만 돌아설 수밖에 없다. 뒷날 참고 자료로 삼겠다고 서문이라도 베낀다. 연암이 본 그 책의 서문은 건륭 31년 병술(1766년) 7월 상순에 능어가 쓴 것이다. 얼추 계산해도 14년 전에 나온 책이다. 보나 마나 종이가 누렇게 변색했을 책이 서점가에서 따끈따끈한 신간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여전히 팔리는 것이다.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다.
이 책이 중국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을 때 중국판 능어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동의보감은 조선의 허준이 엮었다. 조선 사람들은 문자를 알며, 글 읽기를 좋아한다. 허씨의 봉, 성, 균 삼 형제가 문장으로 유명하며 누이동생 경번의 재주와 이름은 형제들보다 더 뛰어나 주변 나라 중에서 가장 걸출하다.”고. 삼 형제와 함께 나열되면서도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경번은 바로 난설헌 허초희이다.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간행된 <열조시집>과 <명시종>에 수록되었고 이름이나 호가 모두 경번으로 되어 있다. ‘규수 허경번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으며 광한궁 옥루의 상량문을 지었다’는 주석이 달렸다. 상량문을 지은 것은 맞으나 8세 때의 일이고 허난설헌은 여도사가 아닌, 김성립과 결혼한 규방 여성이다. 남편의 친구들이 장난으로 네 아내가 두번천을 사모한다고 했단다. 두번천은 당나라의 시인 두보다. 여자가, 비록 수천 년 전에 죽은 시인이라 하나, 외간 남자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발칙한 일인 시절에 허초희는 인간세상에서는 김성립과 헤어졌다가/지하에서 오래도록 두목지를 따르리라 라고 시를 썼다.
규방 여성으로서는 아름다운 일도 아닌 시짓는 일을 한 난설헌 허초희는 민감한 소문이 나봤자 나만 원통한 시대에 살았다. 연암도 난설헌의 이름과 호가 잘못 기재되었다고 지적만 했을 뿐이다. 이름과 자와 호를 제대로 알되 불러주지도 않으려는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글을 불태워 없애라는 유언뿐이었다. 그런데 옆나라 중국에서는 그녀의 시를 출판하고 읽어주고 부정확하게나마 이름을 기억해 준다. <난설헌시집>은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며 또 다른 조선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난공 반정균이 그녀의 시를 칭찬하자 홍대용이 위의 시를 들려주며 반박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이 시가 난설헌을 음해하는 가짜 시라고 했다. 가짜 시라고 계속 말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그런 나라,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 자기의 작품으로 낙양의 지가를 올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글도 얼마든지 쓸 사람이 우글거리는 21세기에도. 나는 진짜 허초희가 썼다고 믿고 기개가 대단하네, 하고 웃고 싶다.
금나라의 이동원이 북의, 원나라의 주진형이 남의이고 조선의 허준은 동의(東醫)이다. 아름다운 책을 중국에 전했으니, 내용을 전할 수만 있다면 출신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능어는 썼다. 허준의 출신지를 안 따진다는 글만 보고도 능어가 청나라 사람임을 알겠다. 화타나 편작 같은 전설적인 의원들이 있는데도 굳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의원을 북의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의원을 남의로 내세웠다. 중국 한족이 아닌 오랑캐들이다. 그러고 보면 오랑캐들이 실생활에 필요한 것에 더 유능했거나 제도화가 잘 되어 있었나 보다.
전할만한 내용이 있다면 출신을 안 따진다는 표현이 뿌듯한 한편 썩 유쾌하지는 않다. 나도 흙수저라서 심사가 약간은 꼬여 있는 탓이렷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어디를 나왔냐고 묻길래, 나의 모교를 밝혔다.(꼭 그렇게 신상을 터는 사람들이 있다) 그랬더니 그 학교에서 이 대학에 들어왔느냐고, 공부를 잘했나 보다, 라는 소리를 한다. 칭찬이다. 그런데 이 추억을 떠올리면 그 칭찬을 듣고 내가 기분이 좋았어야 하는지 안 좋았어야 하는지 여전히 착잡하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지 못하고 꼭 출신을 참조하는 데에서 차별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일 것이다.
의서 80여 종을 인용하고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보충한 동의보감은 황제로부터 최고의 책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초판본이 나온 지 3년 후의 일이다. 불과 3년 만에 조선, 중국, 일본에서 실제로 사용되어 효과가 입증되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장서각에 잘 보관되어 민간에서는 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사람을 일부러 보내어 동의보감을 베껴오게는 했으나, 간행은 못한 일도 있었다. 능어의 친구 좌한문이 출판 비용 300 꿰미(엽전 1천 개)를 내놔 일개인이 백과사전을 냈다. 대단하다.
연암은 명색이 양반인데 다른 데는 아껴도 책값은 아끼지 않았을 터이다. 문은 닷 냥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빌리려고도 하지 않고 돌아선 것이 가난해도 어지간히 가난했나 보다. 동의보감 책을 사기 위해 어떤 이들은 계를 들었다. 또 마을 단위로 책을 구비해 놓고 글 읽을 줄 아는 이가 의사 노릇을 했다. 선비이자 의원인 유의(儒醫)가 이렇게 생겨났다. 그러니 동의보감을 아는 어떤 선비는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 의사가 동의보감을 제대로 공부했나 테스트를 해본 후에야 그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동의보감은 간행되자마자 조선, 청나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청나라 사행을 간 사람들마다 연경 유리창의 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는 것을 확인했다. 오늘날에도 동의보감은 세계기록유산이며 국보 제319호다. 현재도 최고의 한방 의서이며 일반인이 쉽게 사용하는 의학지식을 담은 세계 최초의 공중보건의서이다. 임진왜란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포기하지 않은 허준이 14년 동안 정력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책이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재판본이 여러 번 나왔다고 한다. 연암의 노력이 빛을 발하여 다른 판에서는 경번 대신 허난설헌으로 제대로 써줬는지가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