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선비 출신 장수의 학성 리스트
ㅡ남송의 충무공 심경지(沈慶之, 386~465)
조선은 문치의 나라입니다. 연암은 문치의 나라 조선의 선비이고요. 주로 문인들과 어울리고 싶었겠지만, 무인도 만나기는 했습니다. 연암은 무인인 산동의 도사 학성을 만납니다. 학성은 박학다식하고 키가 8척이 넘고 붉은 수염에 서글서글하고 뼈대가 정밀하고 단단한 남아입니다. 학성은 밤낮 필담을 주고받으면서도 피곤해하지 않았습니다. 연암이 반선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는 연암더러 반선의 생김새가 어떠하더냐고 물었지요. 학성에게는 거울은 문자로 쓰지 않은 불경이고 불경은 구리로 만들지 않은 거울입니다. 열흘 동안 고기를 안 먹고 목욕재계를 해도 털끝만큼 부정이 있다면 반선의 신통력있는 거울의 색깔이 변할 거라고 믿는 우직한 무인입니다.
반면에 그는 공직생활에 잔 뼈가 다 굵은 남자이기도 합니다. 청나라와 황제에게 괘씸죄로 걸릴만한 표현이 나왔다 하면 필담하던 종이를 구겨 주먹에 거머쥐는가 하면 아예 잘게찢어 입에 넣고는 씹어댑니다. 공부를 좀 했다면 속된 말로 먹물이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필담 종이를 줄창 씹은 학성이라면 문자 그대로 먹물이 듬뿍 들었겠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별 것도 아닌 일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이 한둘이던가요? 문자옥이라는 형벌의 엄정함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끼는 탓입니다. 그런 학성이 말을 했다 하면(이 경우에는 글을 썼다 하면) 천자의 명성과 교화가 동쪽 조선으로 퍼지고 있으며 성스러운 천자의 문화와 교육이 천하 사방에 이른다는 칭송을 입에 침이 마르게(이 경우에는 붓끝의 먹물이 말라 붙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연암은 학성에게 중국 무인의 자질을 묻습니다. 연암이 보기에 학성은 역사적 사실에 익숙하고 문필이 유려하거든요. 이름 있는 학자나 노련한 선비라도 너끈히 맞먹을 수 있어 보입니다. 청나라에서는 무인도 학문이 넉넉해야 하느냐 또는 학성 스스로 반초 장군처럼 문인이지만 무인의 길에 접어들었느냐? 놀랍게도 학성은 대대로 농민 집안 출신입니다. 문무가 균형을 이루는 시대를 참 잘 만난 셈입니다. 중국에서는 역대로 문무를 겸전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 태학사와 전 태학사가 모두 문무를 겸전한 것을 보더라도 이런 태평성대에는 자기 정도는 일개 평범한 무인에 불과하다고 학성은 한껏 겸손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렇게 글 읽는 장수로 학성은 손무, 오기, 염파, 악의, 왕전, 조충국, 반초, 심경지, 한세충을 듭니다. 손무와 오기는 병법서를 지은 이들로 손자와 오자라고 불리는 인물들입니다. 조나라의 장수 염파라, 어쩐지 이름이 귀에 설지 않다 싶더니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또한 자기를 살피러 온 사신 앞에서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고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오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는 인물입니다. 이들이야 목록에 들 법한 인물들이지만 심경지에 이르러서는 연암은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자무식인 심경지를 선비 출신 장수에 끼워줬기 때문입니다. 학성도 웃기는 합니다만,
심경지가 목록에 든 이유를 말해 줍니다. 한번은 심경지가 황제에게 말했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집안일에 비유할 수 있사옵니다. 밭갈이는 농부에게, 바느질은 아낙에게 맡겨야 하는데 폐하는 어찌 북벌 출병을 백면서생과 논의하려 하시나이까?" 라고.
백면서생(白面書生)이란 야전을 누비며 햇볕에 얼굴이 검게 탄 무인에 비해 집안에서 책만 읽어 얼굴이 하얀 선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은 옳다마는 그래도 그렇지, 말 한마디로 학문이 있다고 쳐주는 건 지나친 과장(誇張)이 아닌가요? 열 살 이후로 전쟁터를 누비곤 했다는 심경지가 어느 틈에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문인들의 말을 믿고 출병한 황제가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무식한 심경지의 견해가 박식한 문인들의 그것을 이겨버렸습니다. 그러니 심경지가 학문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학성은 또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시를 도도하게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장수로서의 재능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시재(詩才)만큼은 따라갈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척계광은 그냥 평범한 무인이 아니라 병법서를 써서 군대를 조련한 장수입니다. 학성 또한 그런 무인을 본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학성은 송나라 장수 조한의 시도 인용하는데 몸만 많이 썼을 터인데 어느 사이에 시를 그리 많이 외울 수 있었을까요? 학성은 시화(詩話)를 지유자재로 인용하여 필담을 합니다. 내가 연암이었다면 나는 조선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을 소개했을 것입니다. 연암은 묻지도 않은 인물을 굳이 소개하지 않았고 혹시 소개했더라도 이미 커다란 벽돌 책이 되어버린 열하일기에 쪽수를 더 늘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게 있습니다. 연암이 충무공을 소개했다면 학성 리스트에는 한 명이 더 추가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