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하서 4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이다. 나는 이제껏 장성 역사 인물인 하서 김인후를 공부해왔다. 장성은 가진 것이 하서 김인후뿐이라, 이에 관한 투자가 절실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생각만 하다 말 일이 하서의 후손을 조우한 덕에 구체화되었다. ‘하서’ 같은 인물이 서(書)와 화(畵)를 거쳐 시(詩)까지 섭렵하러 왔다. 그러니 내가 만난 것은 그의 선현인 선비시인으로서의 하서 김인후였다.
그분이 김병효의 『하서 김인후 선생 이야기』를 건네준 것이 계기였다. 나는 그 책을 초등학교 고학년 아동들에게 가르쳤다. 30년 전에 나온 책에는 한자어가 일상용어였다. 8차시에 걸쳐 가르치는 고생과 배우며 고생이 이어졌다. 나는 안동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일대기>를 다룬 책을 읽고서는 "바로 이거야. 하서 김인후를 이렇게 써주면 얼마나 좋겠어! 하서 후손은 작가 하나 없나" 하고 불평하며 1년차를 마무리했다.
2년 차에는 성인 동아리로 하서 유적지를 탐방했다. 우리는 광주 중외공원의 하서 유적을 보면 “이거 장성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나중에 리모델링할 때 달라고 하면 좋겠다. 장성에 설치해 놓게 말이야.’ 했다. 훈몽재를 보면, 한 2년 거주한 하서를 순창이 이렇게 잘 활용하는 것에 배가 아팠다. 어사리(御賜梨) 앞 표지판이 우거진 잡초에 뒤엉켜 안 보이면, 문화재 관리가 소홀하다고 성토를 했다. 어른의 공부는 문제의식이 날카로워 좋았다.
3년 차에는 고학년 아동들에게 하서의 한시 대여섯 수를 수박 겉핥기 정도로나마 가르쳤다. 그 독후활동으로 시화 만들기를 시켰다. 글씨인지 그림인지 모르는 걸 끄적끄적 써놨어도 그저 대견하기만 했다.
다. 겉으로는 하서의 한시를 내세웠어도, 애들의 한자 급수를 올리는 데 기여하는 것이 나의 의뭉한 속내였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기동(奇童)은 끝이 좋지 못한 법이지만 이 아이만큼은 영종(寧終)할 것"이라고 예견된 하서 김인후를 조금은 닮아, 이토록 불합리한 세상에서 견디고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4년 차인 올해에 하서 수업을 한 번 더 한다. 내가 하도 ‘하서’, ‘하서’ 거리니까 한 놈이 ‘또 하서에요?’라고 포옥 한숨을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도야, 하서 5분 해설사> 8차시 수업을 기획했다. 하서 유적지 5분 해설하기를 목표로 시나리오를 쓰고 5명이 5분 동안, 각각 마이크(?)를 잡았다. 본받을 사람이 아이돌밖에 없는 아이들이, 하서를 통해 위대한 인물을 탐구하고 본받는 삶을 고민하기를 바랐다. 이거 가지고선 택도 없는 줄 알지만서도.
이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난산암을 찾았다. 올곧은 선비의 우렁찬 통곡소리를 받아주고 그 꼿꼿한 결기에 곁을 내줬던 소박한 바위 하나가 400년 전과 다름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1세기의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지키려고 버텨야 하느냐고 답도 없는 문제를 곰곰히 생각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많은 사람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려고 하는 마음가짐 하나는 예나 지금이 어찌 다르랴. 이렇게 하서를 떠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