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 천년에 한 번 만나는 기회

by 정영의

사람의 성격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안정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어떤 이는 끊임없이 움직여 새로운 공간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연암은 후자였어요. 왕의 품에서도 바둥거리며 빠져나오고 경계를 넘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런 연암도 세 번쯤은 결정 장애가 오더라고요. 무엇이 이 상남자로 하여금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게 만들었을까요?


첫 번째는 국경인 책문에서의 일입니다. 조선 사신단이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연암은 책문 안쪽을 관찰합니다. 벼르고 별러 떠나왔건만,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저쪽이 왠지 낯설어요. 되돌아가고픈 충동이 강렬하게 솟아오릅니다. 여행이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막상 그 앞에 서면, 망설이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나는 문득 선택 관광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전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낯선 이에게 실없이 말을 건네며 시간을 죽이던(?) 시간. 하지만 연암은 나와 다르지요. 그의 기다림은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라, 홀연히 기가 꺾여 ‘여기서 바로 되돌아 갈까’, 하고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강렬한 갈등이었어요.


긴 워밍업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했습니다. ‘이 격한 감정은 바로 시기 질투였어요. 이미 여러 번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질투하는 것을 마음에서 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의 국경에 한번 발을 들여놓고 본 것이라곤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않은 터에 망령된 생각이 솟다니, 견문이 좁은 탓입니다’. 무엇이 제인지는 알았지만, 해결은 어떻게 하나요? 견문의 부족이 가져온 감정을 수신(修身)할 방법이 없습니다. 연암은 유가의 선비인데도 불구하고 불문의 의 눈을 빌어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열하로 가느냐 마느냐였어요. 청나라 황제들은 여름이면 북쪽을 넘나들며 사냥하다가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쉬었습니다. 1780년 8월에 조선 사신단이 도착한 연경에는 황제가 없었어요. 남의 나라 황제가 칠순(七旬)을 맞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더구나 명나라도 아닌 청나라의 황제를 무엇 때문에 축하하고 싶겠습니까. 영명한 정조 임금이 별도의 조공으로 보낸 신의 한 수였을 뿐이에요. 전례가 없느니만큼 보고서만 달랑 올리고 조선인들이 불안하게 시내 관광을 즐기는 동안 황제는 예부의 관리들에게 감봉(減俸)을 명합니다. 조선 사신단을 열하로 보낼 것인지 여부를 물어봤어야 했짆아! 당장 열하로 보내!


조선 사신단은 인원을 줄여 출발해야 합니다. 연암은 이 두 번째 갈림길에서 머뭇거립니다. 몸은 여독에 지쳤고 말도 사람도 기진맥진한 채로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달려야 하나요!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여기에 다 있는데, 연경 유람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정사는 단호합니다. ‘열하 여행은 누구도 가지 못한 길이니, 귀국하여 열하가 어떻더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터인가? 북경은 아무나 오지만, 열하는 천 년에 한 번 만나는 좋은 기회이니 가야 하네.’ 연암은 마지못해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게 가게 된 열하가 연암으로 하여금 『열하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연암이 평생 쓴 글자 50만 자 중에서 40%가 쓰인 이 '벽돌책'을요.


세 번째는 말을 틀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입니다. 열하의 피서산장에 사람들이 우글거려요. 연암은 인파를 헤치고 조선의 통역관 득룡에게 다가갑니다. 득룡은 늙은 몽고왕과 양손을 붙잡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어요. 연암은 득룡과 함께 건장한 다른 몽고왕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그는 뭘 묻더니 대답도 안 듣고 가버립니다. 쑥스럽네요. 득룡은 다른 사람들과 두루 인사를 틉니다. 득룡이 한번 읍하고 말을 걸면, 모두 읍으로 답례하네요. 와글와글 들끓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를 붙잡고 인삿말을 건네어 자기를 소개하고 또 다른 사람과 그다음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득룡은 연암에게 몽고어 인삿말과 자기 이름 소갯말을 알려주며 해보라고 권합니다.


득룡은 언어 능력자답게 늙은 몽고왕에게 먼저 말을 건넵니다. 노인에게 말을 걸어요. 해외여행에서 영어회화 연습 상대가 필요하면 공원으로 가면 된다잖아요. 공원에서 온종일 볕 바라기를 하는 노인들에게 말을 건네면 친절하게 상대해준대요. 감사의 표시로 자그마한 기념품 하나 건네주면 무난하고요. 인파 속에서 무슨 깊은 대화를 나누겠습니까. 그냥 인삿말이면 됩니다. 연암이 다른 양반들과 달리 호기심도 많고 트인 데가 있으니 이것도 시켜보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득룡은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연암은 득룡이 알려주는 생활 몽고어 예문이 생삽(生澀)합니다(=껄끄럽고 어색하다) 한밤중에 초면의 젊은 중국인들과는 먹고 마시며 필담을 나누고 애틋한 이별을 했으니, 더 열 것이 없을 만큼 다 열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안 되네요. 어떻게 처음 본 몽고왕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고 대화를 해요? 하인인 득룡은 해도, 양반인 연암은 못 해요. 붓으로는 얼마든지 자웅을 겨룰 채비를 갖추고 서양 선교사도 만날 작정을 했는데 유독 몽고족은 선택지에 없었어요. 이 순간 연암은 자기가 비판해 마지않던 다른 조선 선비들의 엉거주춤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에요. 그 표정인 채로 숙소로 돌아가지요.


나는 생각합니다. 만약 연암이 그날 그 어색한 몽고어를 입 밖에 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대화가 오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연암이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면, 우리의 시야는 그만큼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요? 작은 선택이 쌓이면 역사의 흐름이 변하는 법입니다. 그가 미완성했던 시도를, 이제는 우리가 완성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연암, 그 거인의 어깨에 무등을 타고 올라 거인보다도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어요. 누구에게든 먼저 웃어주고 먼저 말을 걸어주자고 결심합니다. (그게 무슨 결심씩이나 필요한 일이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MBTI의 I에게는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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