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황제의 어찬을 나도 맛봤네

by 정영의

열하에서는 황제만 보러 가면 뭐가 생깁니다. 꼭두새벽부터 업무가 시작되어 황제가 아침 수라를 드시고 그 상의 음식을 내려주면 그게 사신들의 아침식사입니다. 때로는 다른 물품도 받습니다. 항상 뭔가를 준비하여 내려주려면 황제도 그리 만만한 직업은 아니겠습니다. 이번에는 황제가 여지즙을 내렸습니다. 통관은 분명히 ‘차’라고 했는데 서장관은 ‘술’이라고 합니다. 누런 비단으로 주둥이를 봉한 것이 황봉주 같다네요. 서장관이 통관의 말을 무시했다기보다는 이 탐스러운 액체가 술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지요. 다들 한 잔씩 마시더니 정말 맛좋은 술이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황제가 외국 사신들에게 술은 안 내릴 것 같지만, ‘매실 열매라도 바라보며 갈증을 푼다’는 격으로 술인 체했겠습니다. 조선에서라면 정성껏 담근 빛고운 약주들을 아내들에게서 받아 자실 분들이 먹고 싶은 술도 마음껏 못 먹고 하루 온종일 시간외 근무를 무급으로 하고 있으니 세상살이가 참 쉽지 않군요. 역시 술 좋아하는 연암은 술이 맛있다고 취기가 도는 체하는 그들 앞에서 ‘술 아닌 것 같다’는 깨는 소리는 안 합니다. ‘내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데, 알콜 도수도 알아 맞출 경지에 도달했구만, 이건 술이 아니구먼’, 이라고 속엣말이나 했겠지요.


새벽에 산보를 하던 기려천이 멀리서 연암을 부릅니다. 바로 쫓아가니, ‘누런 비단으로 봉한 것을 맛이나 보자’고 합니다. 황제가 조선 사신들에게 하사한 것이 뭔지 궁금한가 봐요. ‘맛보자’는 것이 으레 받아 버릇해 먹거리인 줄 압니다. 연암은 숙소에 들어가 모난 호리병을 기울여 봅니다. 한 잔쯤 남았네요. 손수 그 잔을 들고 여천에게로 돌아갑니다. 연암이 잔을 넘겨주니 여천이 말합니다. 여지즙이라고요. “여지는 나무에서 딴 지 하루만 되면 즉시 향과 색이 변하니까 꿀에 재어두는 법”이라네요. 자기는 연경에서 여러 번 하사받았고 어제도 받았답니다. 청나라 사람이나 조선 사람이나 황제의 어찬을 똑같이 맛보고 사는 걸 보니 똑같이 황제의 신민(臣民) 맞습니다.


기려천은 잔 하나를 꺼내어 소주 대여섯 잔과 연암의 여지즙을 섞어 휘휘 젓습니다. 여지즙 특유의 달콤쌉싸름한 향내가 확 퍼졌겠지요. 매운맛이 술기운을 얻어 더욱 은은한 향내를 냅니다. 여천의 권유를 받아 마셔보니 맑은 향기가 입에 그득하게 퍼지며 달고 시원합니다. 연암이 잔을 돌려 권하니, 여천은 사양합니다. 뭔지 모를 때는 맛 좀 보자더니 여지즙인 줄 아니까 맛을 볼 필요가 없잖아요? 애주가인 연암을 위해 묻지도 않고 곧장 소주를 섞었어요. 연암은 얼떨결에 여지즙 술 한 잔으로 아침을 열었네요. 크으~ 여지 와인 한 모금에 시 한 수가 흘러나오지 않았을까요?


여천은 귀주 안찰사로 재직 중입니다. 항상 여지를 먹는다네요. 전라도 사람은 입만 열면 곧장 시가 된다는데 중국 사람도 입만 열면 시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여천은 ‘날마다 여지 300개를 먹으니 이제 영남 사람이 다 되었구나(원문-‘매일 여지 300개를 먹으니 길이길이 영남사람 되어도 사양하지 않겠다‘)라고 곧장 읊조립니다. 그 유명한 소동파의 시의 일부입니다. 예전 영남지방에 소동파가 귀양을 갔답니다. 그는 여지를 즐긴 나머지 ’날마다 여지를 먹어 귀양이 안 풀려도 괜찮다‘는 시를 지었다지요. 여천은 불계를 좇아 술을 끊었다고 합니다. 황제가 내려준 여지즙을 마실 때도 소주는 안 섞었겠지요. 그런데 안 마시는 소주를 왜 지니고 다녔을까요?


중국 여행에 나서며 연암은 청심환을 준비해 왔어요. 조선 청심환은 사람을 만나고 벗을 사귀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었어요.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 황제도 조선 사람, 청나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어찬을 계속 내려주고, 기려천도 마시지 않는 소주를 지참하여 사람을 만나면 대접부터 했겠지요. 연암과 교유하는 일에도 신경을 많이 쓰더라고요. 자, 그러니 사귐이 더욱 돈독해지기 위해서라면, 오늘 점심식사를 함께 할까요? 뭐 먹을까요? 장터에 있는 함지박 식당의 추어탕이 맛있다던데 그거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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