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성인을 뵙고 물러나면

by 정영의

열하일기의 절반은 일기입니다. 어른 연암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날짜와 날씨를 꼬박꼬박 써 놓은 게 새삼 감탄스럽습니다. 연암의 노정을 따라 지도를 펴놓고 짚어가며 읽는데, 열하 이후부터는 일기체가 아니라 주제별 수필이군요. 연암은 순천부학에서 조선관까지의 견문을 알성퇴술이라 불렀습니다. 조선 삼사(三使)와 함께 공자 사당에 참배하니 알성이요 그 이후에 물러나 글로 쓰니 퇴술입니다. 공자에 관련된 시설들을 주로 보되 다른 것도 곁들였습니다.


원나라 시대에 한 승려가 절에 불상을 안치하려는 순간, 공교롭게도 명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북경이 함락됩니다. 공자의 사당에 난입하지 말라는 군율이 있다길래, 승려는 공자의 신주를 빌려와 대웅전에 모셨습니다. 다행히도 봉변은 면했으나, 누가 감히 이 위패를 건드리겠습니까. 명나라가 멸망하고 북경이 청나라의 수도 연경이 된 다음에야 이곳은 순천부학(順天府學)이 됩니다. 순천부학은 공자의 사당과 교육 시설을 갖춘, 지금의 성균관 대학교입니다. 승려가 얼떨결에 한 일이 석가의 집을 공자의 집으로 바꿨습니다.


명나라 초엽에 고려의 김도가 태학(순천부학)에 입학하여 과거 급제를 했습니다. 1567년에는 천자가 국자감(태학-순천부학)에 와, 조선의 이영현 등 여섯 감생더러 의관을 갖추고 참배하도록 했습니다. 공자에게 참배하는 건 선비라면 으레 하는 일입니다. 연암도 부사와 서장관과 함께 열하 태학의 앞뜰에서 재배례를 했습니다. 참배하는 건 열하에서나 지금 연경에서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열하에서는 벗들이 가이드를 해줬는데, 연경의 벗들은 시간이 안 맞았나 봅니다. 보고픈 비문(碑文)도 어디에 있는지 몰라 못 찾았습니다.


국자감(태학)의 넓이는 580칸이며 관련 건물이 셀 수 없습니다. 국자감은 한나라 때는 1800칸에 감생 3만 명, 당나라 때는 6200칸이었습니다. 명나라 때는 1371년에 2782명, 1393년에는 8124명, 1421년에는 9884명이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청나라가 뽐내어도, 국자감의 십중팔구가 빈방인 것이 연암의 눈에 띕니다. 며칠 전 석전(釋奠)의 참석자가 400여 명인데, 만주인과 몽고인뿐이요, 한인은 하나도 없었지요. 어쨌든 연암은 텅 비었다손 쳐도 깨끗이 정돈된 것만은 본받을 만하다고 훈훈하게 수습합니다.


다음날에 역대비(歷代碑)를 봅니다. 밤샘 토론도 하는 한편 계속 돌아다니니 나로서는 엄두가 안 나는 강행군이자 주경야독입니다. 연암은 이번에는 역관 조달동을 섭외하여 비문 베끼기를 합니다. 좀 넓어야 말이지, 투덜거리며 줄달음을 쳐서 쓰지만 다 베끼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을 겁니다. 지금 다 봐야 하는데, 글은 많으나 두루 열람을 못해 유감이라고 애석해 하는 연암의 말에 나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슁 날아가 찰칵찰칵 찍어 주고픈 심정입니다.


명조진사제명비(明朝進士題名碑)도 봅니다. 명나라 이백여 년에 공간이 부족해 더 안 세운다고 했답니다. 그 비석으로 촘촘한 파밭에다가, 어디에 비를 더 세우냐고 연암이 제 일처럼 걱정합니다. 걱정도 팔자유! 선조의 진사비를 위한 공간을, 자손이라면 어떻게 안 만들겠습니까. 한때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장성의 백양사 쌍계루는 유명인의 시는 복원했지만, 무명씨(?)는 놔뒀죠. 그런데 그의 자손이 자비(自費)로 현판을 만들어 왔습니다. 정몽주의 글과 내 조상의 글이 나란히 걸린다면 몇십만 원이 문제입니까?


열 개의 돌북-석고(石鼓)도 봅니다. 주나라 선왕 시절의 유물입니다. 창려 한유는 사방에 흩어진 이 돌북들을 태학에 모아 보존하자고 썼고 소동파도 <속 석고가>를 썼습니다. 연암이 청년 시절에 배우며, 석고에 새긴 글의 전문(全文)을 봤으면, 하는 (당시에는 얼토당토 않은) 소원을 품었던 것이 26년 후에 그 석고를 어루만지며 반적의 석고문음훈비(石鼓文音訓碑)를 읊조리고 있으니, 꿈인가요 생시인가요! 이 부분에서 내 손가락도 그 돌북의 물성(物性)을 더듬듯 절로 꼼지락거립니다. 어이, 빨리 인증샷 찍어! 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입니다.

문승상사(文丞相祠)는 송나라의 승상 문천상의 사당입니다. 문천상은 구경꾼 만 명 앞에서 남향하여 두 번 절하고 처형당한 충신입니다. 뜻을 꺾지 않고 목숨을 저버린 그에게 원나라 황제는 나중에 추증과 시호를 내렸답니다. 나라의 녹을 먹은 자는 마땅히 그 나라의 흥망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조선이 일제에 넘어갈 때도 스스로 목숨을 저버린 인물이 있었습니다. 매천 황현이었습니다. 관직이 없으니 사직을 위해 죽을 의리가 없지만, 오백 년 사대부를 기른 나라가 망할 즈음에 죽는 선비 하나가 없으면 애통하다며 자결합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황현이 적의 손에 처형당한 문천상보다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연암은 관상대(觀象臺)를 보며 친구 석치를 기억합니다. 우리나라 강진현 북쪽 끝에 나온 곳은 북극 몇 도인데, 황하가 회수에 들어오는 어귀와 직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탐라의 귤이 바다를 건너 강진에만 오면 탱자가 된다”고 하는. 황하는 북위 35도에서 시작하여 32~34도 사이에 있는 회수로 들어옵니다. 탐라(제주)는 회수 남쪽이고 강진은 회수 북쪽입니다. 탐라의 귤이 강진에서는 진짜 탱자가 되나 안 되나 찾아보려다가 나는 제풀에 사그라들었습니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 시대인데 탐라의 귤이 강진의 탱자가 되겠나, 여전히 귤일 테지요.

시원(試院)의 언급도 재미있었습니다. 벽돌담 위에 가시를 얹은 건물이래요. 수천 채의 집과 집 사이에 반 칸의 간격을 두어 창문으로 볕이 들어옵니다. 판자문에 작은 온돌, 부엌과 목욕탕까지 있으니, 현대판 원룸보다 훨씬 더 인도적(人道的)입니다. 거인(擧人)의 시험지는 60cm*186cm 크기인데 잘잘한 글씨로 천 자(字)는 담겠습니다. 이 종이에 채점관의 성명도 쓰고 그 채점관이 평점란에 피드백도 써준답니다. 떨어지는 이유를 사제지간처럼 친절하게 알려준다니, 우리도 그랬으면 진짜 좋겠어요!(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할까요?)

조선관(朝鮮館)은 조선 사신의 숙소입니다. 지난해에 화재가 났었어요. 한밤중에, 장갑군 수천 명과 물수레 몇십 대가 달려왔답니다. 연거푸 수레 물통에 물을 길어 붓고 소방관들은 벙거지와 갖옷을 적셔가며 도끼·갈퀴·낫·창을 들고 헐고 돌격하여 곧 불을 껐답니다. 물을 부을 때 한 방울도 허비하지 않고 불을 끄면서도 유실물이 없었다며 연암은 중국의 규율을 강조합니다. 똑같은 성리학의 나라들인데 청나라가 하는 일을 조선이 못하라는 법이 있냐고요. 시원을 언급할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 소방차(?) 얘기에서는 본격적으로 본받을 만한 것은 제도 개선을 하자는 목소리를 얹는 연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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