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군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집사가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00교-정통 기독교에서 이단이 라고 부르는-의 행사에 가게 되었습니다. 자, 덕담과 격려의 수위를 어느 정도로 잡아야 신앙 양심에도 거리끼지 않고 공직자로서의 중립성도 훼손하지 않을까요? 기독교인이라고 불교 행사에 안 갈 수도 없는 법, 사찰 행사에서는 어느 선까지 예의를 갖춰야 반감을 사지 않고 처신도 무난할 수 있을까요? 한번은 모 교회의 작곡가 장로가 찬불가를 작곡했습니다. 교계 여론의 뭇매를 맞고 그는 오랫동안 뼈저리게 회개를 했습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1780년 8월 11일에 조선 사신단이 부딪친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찰십륜포의 반선을 만나라는 황명이 내렸지요. 거절해 봤자 ‘즉시 만나라’는 황명만 거듭 받습니다. 말 안 듣고 애먹이던 조선이 어쩌자고 유례없이 칠순 축하 사신단을 보냈단 말입니다. ‘그 나라는 예의를 아는구먼’하고 흐뭇하여 황제는 조선 사신단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고 호의적으로, 반선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입니다. 문제는 오랑캐 땅에 태어난 주제에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하는 철두철미한 유교국 조선입니다. 만주족 오랑캐이지만 그래도 황제인 건륭제에게는 조선 임금부터 올린 고두례를 조선의 신하된 자가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반선에게까지 그래야만 할까요?
사신단은 반선을 만났을 때 ‘고두례를 하라’는 눈짓을 외면하고 그냥 앉아버렸답니다. 이미 앉았으니 어쩔 것이냐, 배 째라는 거죠. 청나라 관리들은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문에 ‘조선국 사신들이 반선 앞에서 땅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사례를 했다’고 씁니다. 조선 사신단에 관련하여 이미 감봉 처분을 받은 예부 관리들이 황제의 처벌을 거듭 받지 않기 위해 거짓 보고를 올렸으며 조선 사신들은 고두례를 하지 않았다는 게 연암의 입장입니다. 저 멀리에서 바라보고 전해 들은 것을, 무심코 읽으면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것처럼 적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겠습니다.
나처럼 다 어리숙하지는 않았던지, 조선 사신단의 고두례 여부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없지 않더군요. 여러 사람이 역사 기록을 참조하여 반선의 다른 이미지를 찾아내었습니다. 반선은 건륭제의 거듭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추위와 질병 등 온갖 고생 끝에 열하에 온 존재였다는 거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라 그의 단점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답니다. ‘두 명의 대신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사신들을 이끌고 반선께 배례를 올렸고 반선은 사신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어 청나라 대신들이 강제로 무릎 꿇고 절하게 했으리라고 합니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말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얀 거짓말 내지는 얼렁뚱땅 초점을 흐리는 언사로 연막을 피운들 신상을 탈탈 터는 이 시대에 못 알아내겠냐고요. 사신단의 정사인 삼종형 박명원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그럴싸한 추측까지 곁들입니다. 조선은 강대국 청나라조차도 오랑캐 만주족이라 노린내가 난다고 얕잡아보던 나라였습니다. 만주족도 못 되는 ‘오랑캐 중’ 반선이야 만나지 않아야 하며 더욱이 그 반선에게 절을 올려? 세상에 이런 일이! 자식의 혼삿길이 막히는 일입니다. 정사인 박명원은 사행의 고생은 아랑곳없이 부처를 받들었다[奉佛之事]는 오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천하의 율곡도 일 년 간 금강산에서 중 노릇한 전력이 죽은 후까지 두고두고 있지도 않은 발목을 잡았다니, 절을 했든지 안 했든지 최대한 없던 일로 할 일이었습니다.
반선에게서 선물로 받은 구리불상은 또 어떻게 하느냐고요? 궤짝에 넣어 압록강물에 띄워 버릴까. 도금 부처는 버려도 된다고 농담은 했지만, 차마 못 버렸나 봅니다. 가져왔으니,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 소동을 벌이지요. 평안북도 영변의 모 절에 불상을 봉안했다는데, 이것이 반선의 구리불상인지도 모릅니다. 열하일기를 쓰는데 삼 년이 걸렸습니다. 이때쯤이면 권당 소동도 가라앉았을 터이지만, 자칫 붓을 잘못 놀렸다가는 가라앉은 불씨를 헤집는 사단이 됩니다. 해외(?)여행까지 데려가 준 삼종형이 봉변을 당하면 안 되니 이곳에 있도 없는 반선은 좀 나쁘게 써주고, 고두례는 없던 일로 하는 게 무난합니다.
멋모르는 청나라 황제는 ‘그 나라(조선)는 예의를 알건만 사신은 모르네 그려’ 했습니다만, 예의를 아는 나라의 사신이 예의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예의를 아는 나라의 신하 노릇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위태로웠을 뿐입니다. 불교신문에는 연암도 불교를 폄훼하는 점에서는 당대 사대부들과 똑같더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절대로 옹호할 수 없던 시대에 불교도도 아닌 연암이 과연 뭔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그는 석가의 말씀을 기억하여 종종 수신(修身)의 방편으로 삼곤 했습니다. 21C 대한민국 헌법에는 신앙과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합니다만, 신앙에 따라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