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영의 Jul 26. 2024

21. 조선아, 너는 예절도 모르느냐?

고려보의 한 점포에 말몰이꾼이 뛰어 들어옵니다. 부녀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점포 주인은 말몰이꾼의 뺨을 후려갈깁니다. 말 모이로 밀기울을 사러 왔다는데 주인은 거듭 ‘예절도 모르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말몰이꾼은 사과 한마디 없이 도망치다가, 뒤쫓아간 주인에게 욕하고 가슴을 후려갈기고 진흙탕에 메다꽂더니 짓밟고 나서 달아납니다. 연암은 사과 비슷한 말을 하여 분위기를 가라앉힙니다. 주인은 화가 누그러지더니 셋째딸을 데려와 수양딸로 삼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연암은 극구 사양하고 청심환 하나를 풀어서 줍니다. 만주족 가정입니다. 

     

뭔가 기분이 찝찝합니다. 왜 이 난리가 났지?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지? 그러기에 앞서 주인이 꾸짖은 말이 머리에 맴돕니다. ‘너는 예절도 모르느냐?’ 점포는 반쯤은 공공장소이니 불쑥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으니 뛰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옷차림입니다. 말몰이꾼은 머리에는 부서진 벙거지 하나 썼을 뿐 허리 아래는 겨우 헝겊 쪼가리로 가렸을 뿐이라 사람인지 귀신인지 몰골이 흉악망칙합니다. 바바리맨이 여고 정문에 출현한 격입니다. 부녀자들이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달아난 것도 당연합니다.      


옷이 문제입니다. 말몰이꾼 백여 명은 모두 의주 사람입니다. 사신단 일로 생계를 꾸립니다. 해마다 북경을 왕래하는데, 그 임금이 일 인당 백지 60권입니다. 좀도적질을 하지 않고는 북경에 다녀올 수 없다고 연암이 지적한 것으로 보아 최저생계비도 못 미치는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에 입국한 이후로는 얼굴도 안 씻고 두건도 안 써서 머리카락이 먼지와 땀에 수세미처럼 엉겨 붙습니다. 단벌 바지는 해지고 구멍이 뜷려 양쪽 궁둥이가 다 드러납니다. 의복이나 벙거지의 부서진 꼴이 도깨비 꼴입니다. 그들이 그러고 싶어 그꼴로 다니겠습니까?      


고려보에서도 그들의 패악질이 극심하여 주민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그만큼 공공연히 훔치고 빼앗으며 도적질을 해대므로 숙소 주인들도 별 방법을 다 써서 방비했습니다. 인솔자인 양반들은 이 말몰이꾼들의 악행을 필요악이라고 방관했거나 아예 천것들의 언행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는 뺨을 맞고도 맞은 이유를 모릅니다. 왜 치냐고 묻거든요. 주인이 꾸짖으니까 그냥 뛰어나갑니다. 애초에 들어온 목적이 무슨 해꼬지를 하려던 게 아닙니다. 물건을 사러 왔는데 살 수 없겠구나, 하고 나간 거지요. 일 처리가 늦으면 주인 양반한테 두들겨 맞을 테니까,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나 사과 한 마디는 해야 할 거 아니냐, 너네 동방예의지국이라며? 주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비 내리는 거리로 놈의 뒤를 쫓아갑니다. 말몰이꾼은 한 대 맞고 끝내려고 했었습니다. 연암이 있는 걸 봤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봐준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쫓아와? 연암도 안 보이는 김에, 말몰이꾼은 몸을 돌려 욕을 하고 점포 주인의 가슴을 잡고 한 방 갈기고 진흙탕에 메다 꽂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한 발로 짓밟은 다음에 달아납니다. 무지막지하게 당한 주인은 몸을 움직이거나 뒤척이지 못합니다. 그런 그의 몸 위로 비가 때리고 젖어 들어 차갑게 식힙니다.      


한참 만에야 그는 간신히 일어나 아픔을 참고 절름거리며 들어 옵니다. 온통 진흙투성이의 발걸음마다 흙먼지가 한움큼씩 쌓입니다. 여자들이 되돌아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자고 연암은 그 민망한 상황에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남이 보는 데서 맞았으니 더 창피하지요. 점포 안으로 되돌아온 주인은 연암을 째려보는데 표정이 험악합니다. 어디 화풀이할 데 없나? 건드리기만 해봐라. 연암은 온화한 얼굴로 ‘못된 놈이 심하게 덤볐다’고 말해줍니다. 그걸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도요. 의외에도 점포 주인은 곧 분을 풀고 웃음을 짓습니다.      


그는 씻고 옷을 갈아입고 여덟아홉 살쯤 되는 딸을 데려옵니다. 수양아비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말몰이꾼들이 수양아비 되는 걸 예사로 했다니, 백여 명 모두 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철이 없지는 않았나 봅니다. 어쩐지 말 한 마디에 화를 풀더라, 이러려고 그랬군요. 연암은 극구 사양하고 주인에게 청심환 하나를 풀어 주고 비가 그친 거리로 나섭니다. 그 와중에도 그 딸 아이의 신발을 보고 만주족임을 눈치챕니다. 아, 연암, 그 눈에 안 보이는 게 도대체 뭡니까? 눈이 현미경도 되고 망원경도 되는 우리의 연암이 이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함으로써 소외계층의 범법행위에 관해 일말의 시사점도 줍니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아는 법입니다. 국가는 외교관의 최말단에게까지도 최저생계비는 지원해야 합니다. 물의를 빚었을 때는, 거기 그대로 머물러 사과할 일은 사과하고 보상할 일은 보상함으로써 수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조선인가요? 그럴 의도가 없이도 여자들을 놀래키고 폭행을 일삼은 말몰이꾼입니까, 혹은 최선을 다해 소동과 난리를 잠재울 수 있었던 연암입니까? 오늘날의 나는 무심코 한 일이 말썽이 되는 말몰이꾼의 눈과 차근차근하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연암의 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연암을 따라 열하 길을 밟아 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