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년의 집은 사치스럽고 그릇은 진기합니다. 여러 명사들의 시를 새겨 벽에 걸어놓았어요. 그 글 중에 윤공의 시도 있습니다. 윤공은 윤두수의 5대손 백하 윤순(1680~1741)입니다. 1723년(경종3)에 사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서학년의 집에 최초로 들렀답니다. 손님을 좋아하는 서학년이 흉금을 터놓고 대접하며, 서화를 보여줬다지요. 그 뒤로 서학년의 이름이 조선에 회자하여 사행이 으레 들르는 집이 되었답니다.
학년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들도 조선 손님들을 귀찮게 여겨, 사행이 올 무렵이면 너저분한 것들만 놔둔답니다. 연암 일행의 거동을 보아하니 서화를 조보 펴듯 피륙을 말라 재듯 그릇을 쨍그랑 소리가 나도록 다룹니다. 주의를 줬겠지만 말해봤자 신청을 안 하니, 연암은 민망해서 나가버립니다. 비장이면 무식한 하인배는 아니어야 하겠지만 섬세한 것을 섬세하게 다루는 교양까지는 없나 봐요. 얼마나 눈치가 보였겠어요. 있을 때 잘해야 하는데 말이죠.
호응권의 화첩 사건만 해도 그래요. 호응권은 한 푼어치도 못 되어 보이는 화첩을 조심조심 받들고 꿇어앉아 여닫는 데도 깍듯이 합니다. 조선 화가들의 그림이 실린 책이라 잘 보완하기 위해 화가의 약력을 적기 위해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든 정진사는 양 손으로 움켜쥐고 책장을 재빨리 넘깁니다. 호응권이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군요. 명색이 양반인데도 예술작품(?)을 상놈처럼 함부로 다루네요. 그렇게까지 청나라의 모든 것을 오랑캐라고 혐오했던 거죠!
예전에 들은 얘기입니다. 루브르에서 한국 유물을 반환하겠다 해서 우리나라 외교관이 받으러 갔나 봐요. 그런데 그 외교관이 그 유물을 맨손으로 휙휙 넘기더라는 거죠. 그걸 보고 박물관 담당자가 사표를 썼다나 어쨌다나. 그 담당자에 의하면 그 유물은 지문이 묻지 않도록 장갑을 끼고, 책장이 찢어지지 않도록 살살 넘겨야 한다는 거죠. 저렇게 무지막지하기 다루는 나라에서 제대로 관리나 하겠느냐, 절대로 돌려줄 수 없다고 고집했다는군요. 유언비어인지 실제의 일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럴 법은 하다고 기억에 남았습니다.
연암은 애석함과는 또 별도로 그 윤순의 2% 부족한 것을 지적합니다. 중국인들의 글씨에 비해 손색이 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금석문자로 글씨를 배워 그런 획에 길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지인이 루브르 박물관에 다녀와 말하더군요. 그림은 원본을 직접 봐야 한다고요. 원본에는 붓질까지 생생하게 드러나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있다나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윤순도 글씨의 모사본을 보고 글씨를 배운 격이고, 피아니스트의 어깨와 팔목,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듯 글씨 쓰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야 할 판입니다.
어쨌든 연암은 그 윤순의 시를 보면서도 우리나라의 명필이라, 그 천재의 화려하고 고운 품이 마치 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 같고, 먹빛이 짙고 연함과 획의 살찌고 여윈 것이 알맞게 섞였다고 찬탄합니다. 이 시(詩)를 지은 까닭에 윤순이 귀국 후에 되놈의 새끼에게 재주를 팔았다는 탄핵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고 당시의 언론이 지나쳤다고도 말하지요. 그리고 호웅권의 화첩은 정진사가 휙휙 넘겨도 되는 오랑캐의 작품이 아니고 엄연히 이름을 날린 조선 화가들의 작품(아마 모사품이었겠지요?)이었던 겁니다.
호생의 화첩에 조선 화가들의 작품이 죽 나열됩니다. 아는 이름만 반갑게 읽었어요. 5만원 권 지폐 뒤쪽 ‘풍죽도’의 화가 탄은 이정의 작품은 ‘녹죽도’와 ‘묵죽도’입니다. 이정은 세종의 현손이고 임진왜란 때 오른손을 잃었으나 왼손으로 그림을 연습하여 더 잘 그렸다는 화가입니다. 겸재 정선도 들어본 이름입니다. ‘춘산등림도’ 네 폭 ‘산수도’ ‘사시도’ ‘대은암도’ 등입니다. 정선은 80세가 넘어도 겹 돋보기 안경을 끼고 촛불 아래에서 가는 그림을 그려도 털끝만큼도 그릇됨이 없었다고 합니다. 표암 강세황의 ‘난죽도’ ‘묵죽도’도 반갑습니다.
공재 윤두서의 ‘임지사자도’도 있습니다. 조선 사람인 윤두서를 강희제 시대 사람이라 써놔 좀 생경했어요. 그래도 청나라 인쇄소(?)에서 출판한 책이니, 그렇게 써야 했겠습니다. 윤두서의 아들 낙서 윤덕희의 ‘심수노옥도’ ‘백마도’ ‘군마도’ ‘팔준도’ ‘춘지세마도’ ‘쇄마도’ 등 다섯 작품이 나오네요.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이며 윤순의 5대조입니다. 윤선도가 시로 이름을 얻은 이래로, 대대로 예술가들이 출현하는 걸 보니 이 집안에는 예술가의 유전자가 흐르네요.
이 이름들은 내가 교과서에서 배우거나 미술관에서 스쳤기에 기시감이 든 겁니다. 나 같으면 동시대인의 작품을 보고 작가와 작품 이름을 몇 개까지나 댈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 광주 미술관에 다녀왔는데, 역시나 이 목록을 읽듯 아는 이름의 그림만 거듭 쳐다봤답니다. 궁금한 것은, 다른 것들은 귀국한 다음에 썼으니, 벗들에게 묻거나 책을 참조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사건을 보면, 중국 현지에서 보자마자 이것은 화가 아무개의 무슨 작품이라고 대뜸 써줄 만큼 연암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억하고 있느냐는 거죠. 사람이 아니므니이다. AI(?)이므니이다 연암 AI설을 주장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