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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Aug 16. 2024

24. 조선에는 만병통치약이 있다!

ㅡ조선 청심환의 위력


절에서 오미자를 말리고 있습니다. 대국답게 몇 섬이나 됩니다. 연암은 무심코 오미자 몇 알을 집어 입에 넣습니다. 중 하나가 쳐다보더니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며 버럭 꾸짖습니다. 다행히도 그 순간 마두 춘택이 들어옵니다. 연암이 아무리 말려도 춘택은 별별 험악한 말로 욕을 하고 중의 뺨을 치고 때려서 자빠뜨려 놓습니다. 으름장을 놓고 벽돌을 뽑아 찍으려고까지 하니 중은 도망쳐서 아가위 두 개를 내밉니다. 청심환을 달라고 하면서요. 아, 청심환! 그것 때문이었구나! 중은 두 명이지만 하는 짓이 얄미우니, 연암은 청심환 하나만 내밉니다. 연암이 떠난 다음 뺨을 맞으면서까지 얻어낸 청심환을 두고 두 중이 헤벌쭉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좋아, 조선 청심환이?


청심환은 원래 중국에서 만들어졌답니다. 심장의 열을 풀어주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어, 이름도 청심환입니다. 조선에서도 『동의보감』에 수록된 대로 청심환이 만들어져 궁궐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조선은 나라에서 청심환의 제조방법을 관리하였습니다. 제주도산 소의 명품 우황을 재료로 하여 품질을 철저하게 관리하니 약효가 우수했습니다.  해마다 동짓달이면 내의원에서 환약을 지어 임금에게 올리고 임금은 이를 ‘납약’이라 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야말로 ‘진환’이라는 이름이 붙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중국 사람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진짜 진짜 조선산 청심환입니다.


거의 만병통치약인 조선 청심환은 돈 주고도 못 사고 또 많은 돈을 줘도, 가짜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연행 사절단의 하인들도 조선의 변경인 의주에서 청심환을 대량 구입하여 2천~3천 배로 부풀려 팔아치웠습니다. 18세기 중반에 연경에 온 홍대용도 ‘조선산 청심환에 가짜가 많다’고 한 것이, 가짜 청심환도 안 먹은 것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계속 팔린 모양입니다. 어쨌든 진짜 청심환은 사행단에게서 직접 받는 게 확실합니다. 청심환은 거의 현금처럼 사용됩니다. 검지 손톱보다도 작아 소지하기에 편리하고 원가도 저렴하여 사행단은 보통 100~200여 개를 지녔다고 합니다. 선물이나 뇌물로 윗사람이나 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가져온 것이,  체면상 가짜이겠습니까? 그 좋은 청심환을 가난하기 짝이 없는 연암도 다량으로 준비했습니다.


6월 28일에는 봉황성 가는 길, 강영태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청심환 한 알을 줍니다(1권 97쪽) 7월 3일에는 책 목록을 보는 댓가로 청심환 한 알과 부채를 줍니다(1권 121쪽) 7월 15일에는 북진묘를 관람하며 도사 세 사람에게 청심환 세 알과 부채와 백지를 줍니다.(1권 279쪽) 7월 17일에는 호행통관 쌍림에게 연초와 주련 그리고 진짜 청심환 한 알과 부채를 달라니까요청받아 내줍니다.(1권 311쪽)  7월 28일에는 수양딸을 삼는 대신 청심환 한 알을 줍니다(1권 413쪽) 8월 3일에는 당낙우의 모친에게서 청심환 한두 알을 요청받습니다.(1권 467쪽) 그 약속을 지켰는지는 책을 더 읽어야겠지요. 8월 7일에는 창대를 위해 500닢과 청심환 다섯 알을 내어 나귀를 세냅니다(1권 518쪽) 8월 14일에는 청심환 10여 개가 있었지만 무례한 요청에는 안 주고 왕민호에게는 한 알을 보냅니다(2권 99쪽) 8월 17일에는 오미자 사건을 청심환 한 알을 주고 수습합니다(2권 129쪽)


이런 식으로 청심환 사용처를 목록하려면 그것만으로도 여러 장을 써야겠네요. 다만 연암은 예속재와 가상루에서 중국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1권 185쪽/205쪽) 그들이 자신에게 준 것만 언급할 뿐 자신이 그들에게 뭘 주었는지 여부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소의 소행(?)으로 보아 넉넉히 줬으면 줬지 안 줄 리가 없다고 짐작됩니다. 머나먼 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가난한 선비 연암에게 현금이나 마찬가지의 위력을 가진 청심환은 엄청난 큰 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청심환 한 알을 매개로 하여 벗을 사귀고 출입금지된 곳에 들어가며, 황당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작은 선물 하나에 조선 선비의 한 생애가 아름답게 담긴 마법의 약, 청심환이었습니다.


요즈음에도 수능시험 날에 자녀에게 청심환을 먹여 보내는 부모가 있습니다. 의약이 발달하고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신속 정확한 치료가 가능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이런데, 18세기에는 어땠겠습니까? 진짜 청심환이야말로 갑작스러운 발병에 가장 먼저 들이댈 만한 듬직한 상비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허생이 허생전에서 과일 대신에 쌀을, 말총 대신에 우황을 사들였다면 어땠을까요? 상상만 해도, ‘없는 사람은 죽으라는 소리냐’ 는 말이 퍼뜩 떠오르지 않습니까? 없는 사람은 없이 살아도 되는, 과일과 말총이라 사재기했다는, 18세기의 허생은 경제정의의 사람이었습니다. 의료 파업이 있기에 자유 대한민국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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