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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Apr 19. 2024

7. 열하일기 버전의 뒷담화

  연암 하면 일단 개혁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개혁적인 인물이라서 개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개혁적인 말을 할 것이다. 그러니 뒷담화마저도 그 수준이 나의 상상을 초월한다. 해박한 지식의 안팎을 뒤져 내가 안 들어본 얘기를 뒤섞어 풀어내니 책 잘 읽다 말고 나는 컴퓨터를 켜고 좋아하는 연예인의 가십거리를 들은 마니아처럼 기어이 인터넷 항해를 해야 하던 것이다.      


  연경까지 겨우 왔는데 열하까지 오라니, 무박나흘로 달려야 할 여행을 앞두고 이별에 관해 연암이 길게도 써내린 글을 나는 무심코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 태종은 자신이 짓고 세운 위문정의 비석을 넘어뜨려 구천에 부끄러움을 남겼다.’는 말에 꽂혔다. 처음 듣는 이야기네. 당태종 이세민은 조선시대의 세조 임금과 비슷한 인물로 그가 짐짓 무서워하는 체하며 직언을 일삼도록 허용해준 신하가 위징인 줄은 들어봤다. 그러니 당태종이 위징을 아끼는 줄 알았는데 묘비를 세워줬으면 그만이지 그걸 무너뜨려?  

   

  ‘거울을 잃었다’고 슬퍼하며 당 태종이 손수 위징의 묘비를 써서 세웠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미담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위징의 직언이 충성심이 아닌, 명예욕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황제의 뇌리를 스친 것이다. 황제는 손수 세운 위징의 묘비를 쓰러뜨려 버린다. 황제가 아니고서야 누가 황제가 세운 비에 감히 손을 대랴. 그렇게 쓰러져 비바람에 젖던 묘비를 황제가 다시 찾아온 것은 고구려 원정에서 참패하여 돌아온 다음이다. ‘위징이라면 고구려 원정을 말렸을 것’이라고 후회하며 황제는 손수 허문 묘비를 다시 세우고 그 유족들을 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위징은 중국 선비의 입을 통해 천하의 간교한 자로 다시 등장한다. 한번은 당 태종이 제환공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환공에게는 관중 같은 신하가 있어야 한다. 관중을 구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위징이 나타나 ‘관중이 여기 있습니다’ 했단다. 관중이 제환공의 반대편에 섰다가 중용되어 중책을 맡은 것처럼 위징도 딱 맞다고 알고 있던 나는, 임금에게 직언을 일삼던 그를 왜 간교하다고 평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그 이유가 없어 궁금한 나머지 무슨 뜻이냐고 묻기 위해 중국에 가고 싶을 정도이다.    

  

  황제나 고위관료의 뒷담화도 재미있지만, 열하일기 버전의 뒷담화로는 공자의 흑역사가 단연 최고다. 연암은 공자의 삼대 출처(三代 黜妻)를 딱 한 줄로 언급한다. 이 충격적인 뉴스를 생전 처음 들은지라 나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랬더니 공자의 가문 삼대-공자와 그 아들 공리 그리고 손자 공급까지 모두 아내를 내어쫓았다는 것이다. 공부자 셋이 수신하느라 그랬다손 치더라도 제가는 어떻게 했을까? 그다지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을 공자가 아내에게 위자료를 주기는커녕 맨몸으로 내쫓았을 터이고, 전처는 재혼하여 오히려 더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평범한 보통 여자가 성인(聖人)과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동정론도 있지만, 누구처럼 아예 미혼이던지, 철도 안 든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했다면 출가(出家)를 할 일이지, 어설피 해놓은 결혼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건 성인으로서는 내세울 일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는 조선의 퇴계 이황이 공자보다 한참 낫다. 퇴계는, 부족해도 너무 많이 부족한 아내를 쫓아내기는커녕 친절하게 보살펴 주는 한편 예의를 충분히 갖추어 사후 장례까지 넉넉하게 치러줬다. 공자보다 더 나은 이가 최소한 여기 조선에 한 명은 있었다.


  딱 한 줄 언급한 것 가지고 내가 이 난리를 칠 줄은 연암도 미처 몰랐으리라. 나는 내친김에 공자의 아들이 말했다는 기가 막힌 유머를 찾아내어 두루 전파했다. 공자의 아들이 공자에게 한 말이다. ‘내가 아버지보다 낫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나처럼 좋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보다 낫다. 아버지는 나처럼 좋은 아들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아들에게도 말했다고 하니, 잘난 아버지와 잘난 아들의 중간에서 잘나지 못해 어정쩡한 자신을 셀프 디스로 훈훈하게 승화시키는 성품이, 선산을 지킨 굽은 나무요 공씨 가문의 기쁨조다.   



  연암, 재미있는 남자다. 엄(격)근(엄)진(지)한 선비로 끝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을 내세운 김대중식 개혁 이미지를 가지고서도 위인들의 뒷담화를 우물가의 아낙네들처럼 소곤거릴 줄도 안다. 나의 노년이 심심하지 않도록 검색거리를 한없이 던져준 줄을 안다면 지하에서 연암은 한바탕 울음(호곡장) 대신 한바탕 웃음(호소장)을 터뜨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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