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해서 마셨습니다
"민호 저자식 또 잔다."
"지난번엔 화장실에서 잠들어서 준식이가 찾으러 다녔었잖아, 진짜 인제 학생도 아니고 왜 저러냐"
"매번 저렇게 잠만자고 동창모임마다 꼬박꼬박 오는거 보면, 본인은 저게 편한거겠지"
고꾸라져서 자는 것 같지만 친구들의 목소리가 민호 귓속으로 간간히 들렸다.
10년 이상 만난 친구들이지만 만남 초반은 여전히 어색해서 힘들다.
술 없이 사람을 대하는게 어려워서 시작부터 소주를 좀 들이켰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더 초조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 누구보다 먼저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묻는 사람은 민호다.
"잘 지내? 언제 술 한잔 해야지~ 좋고말고"
만나지 않고 전화기 너머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건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두루두루 연락하고 지내는 편이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느낌의 사회연대를 꿈꾼다.
그런데 모임에만 가면 이야기가 꼬일때가 많다.
"공적제재를 가하는 게 안되면 사적제재도 필요하다고 봐, 나는"
듣는 사람의 표정이 변하면 내가 할 말은 초점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나는 어딘가 숨고싶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때는 술이 필요하다.
"나 학교다닐때 사회동아리 활동했었잖아, 그거 너도 알지?
나는 이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게 내 인생 목표라고"
한두잔 들어가고 나면 얘기를 시작하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은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들의 얼굴과 표정이 눈에 들어오면
민호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채 말을 빨리 마무리한다.
"그러니까 마셔! 한잔해야 된다는 거지, 우리에겐 술이 있잖아"
허공에 내뱉는 내 말이 저 표정을 하나하나 변하게 하는건지 너무 신경이 쓰여서 말을 못 잇는다.
당황해서 열기가 확 달아올라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그 기분은 몹시 곤혹스럽다.
술취한 듯 붉어진 얼굴이라면 친구들도, 직장 동료들도 불편해하진 않겠지.
그래서 한잔,
창피함을 이기기 위해 또 한잔,
용기내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려고 또 한잔,
술을 마시면 노곤한 기분도 좋지만 친구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이 있다.
안전한 환경이 설정되었다고 느끼면 고삐가 풀릴 때도 많다.
불안이 높고 긴장을 자주하는 민호는 허용되는 곳이라고 판단되면 마음껏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친구들은 내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내가 쓰는 단어가 너무 수준이 높아서 그런가, 나처럼 민주주의와 시민연대에 고민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 그래'
정의, 진실, 노동, 이런 단어들이 좋았다.
지난번에도 분명히 칭찬을 한거였다.
누군가 대구탕 사진을 동기톡방에 올려서,
여자동기 : 오늘 저녁은 대구탕 먹어야 겠네
민호 : 와~ 대구탕도 뚝딱 하나봐 대단한데
여자동기 : 뭐래니? 사서 먹는거지
그날 톡 이후로 그 여자동기는 성인지감수성이 낮다는 둥, 저런 남자 만나는 여자는 엄청 골치아프겠다는 둥 한심한 놈 취급했다.
가까이 앉으면 무슨 병이라도 걸릴까봐 걱정되는 듯이 멀리 떨어져 앉았다.
"여자들은 요리 잘하나보다고 말하면 왜 발끈하냔 말이야"
억울해서 사무실에 김과장한테 얘길 했더니,
"아줌마, 솥뚜껑 운전이나 하라는 그런 옛날 말이랑 똑같게 들리나보더라구요, 뭐~"
"나는 요리 잘하는 남자동기도 칭찬한단 말이다"
"한국여자 특유의 예민함이 있죠, 여자 = 요리, 여자 = 집안일, 여자 = 육아 등등 시집문화, 남녀격차 그런 얘기는 가능하면 꺼내지도 말아야 돼요, 우리 엄마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하는거 보면~~ 흑인들한테 'black'이라고 하면 차별언어 쓰는 사람이라고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니 혐오주의니 하는 말도 있잖아요, 무슨 말도 못하냐 싶긴한데 세상이 바꼈다고. 옛날 아버지 세대야 사회 구조상 여자들이 돈을 많이 못버니까 어떻게 말해도 먹혔겠지만, 뭐, 요즘은 혼자 벌어서 아파트를 살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거죠, 시대가 우리를 버렸어요 ㅎㅎ"
아버지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은 별로 없다.
엄마가 무엇에 반응하고 표정이 변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늘 같은 지친 표정이었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셨다.
그래서 그랬을까, 민호는 웃는 여자 얼굴이 좋았다.
"웃어야지, 나는 웃는 얼굴이 좋은데."
이렇게 말하면 여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썩은 표정으로 변했다.
좋아하는 것도 이야기하면 하되는 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그런 표정들이 떠오를땐 술을 마시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배운 적이 없는 규칙이 사회에는 존재한다.
민호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무시당했다고 느껴지자 어쩔 수 없이 분노가 느껴졌다.
이런 분노감으로 공부에 매달리고, 일에 매달렸다.
뭐든 사람의 표정이 아닌 텍스트, 이미지에 매달려서 찾아보면 거기엔 분명 정보가 있었다.
원하는 건 뭐든 찾아낼 수 있었다. 사설탐정이 되었다면 좋았을 것을.
내가 대화의 게임에 졌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모멸감을 연료삼아 폭발적인 에너지로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
팀장님 눈빛이 반짝하는 부분에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표현하고 나면 팀장님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좋았어!"
도파민이 터진다.
편지로 연애하는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정말 잘 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그런 뜻인 줄 전혀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