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욕구

허술한 결론이라도 괜찮다면

by 소설

결국 나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글쓰기를 나의 ‘단 한 가지’라고 떠올렸을 때, 나는 글을 통해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고 깊은 상처가 천천히 치유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정돈된 삶을 사는 사람. 그 이미지에 오래 매달렸다.

그러려면 내 속마음을 그대로 바라보고 써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그게 두렵다.

내 마음속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불성실하고, 제멋대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늘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지 못한다. 가까워졌다가 숨고, 다시 나왔다가 또 물러난다.

방어기제의 벽이 높아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괜찮은 사람인 듯 지내다 실제 마음속이 들킬까 두려운 거다. 그러다 보면 다정하게 대하던 상대방의 마음도 순간 식어버린다. 냉랭해지면 나는 서운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자존심이 상해 멀찌기 뒤로 물러 선다.


나는 늘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 의견이 별로일까, 상식에서 벗어날까 봐, 사회적인 이슈에 둔감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내 무지가 한순간에 드러날까 봐 늘 노심초사한다.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를 읽고 나면 깔끔한 결론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 로봇처럼 의지를 통제하며 사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의문이 든다. 그 의문이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희망을 말할 때, 나는 속으로 그 희망이 꺾일 수만 가지 시나리오를 쓴다. 비관은 나의 가장 오래된 방어기제다.
어떤 선택 앞에서도 먼저 ‘안 될 이유’를 떠올린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없을까.


얼마 전, 유명한 강사의 심리 상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커플의 사연을 유튜브로 보았다. 늘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남자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낀다는 여성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양양 서퍼비치에 가든, 직장 동료로부터 관심 어린 식사 제안을 받아도 그는 모두 허용했다. 어차피 느슨해질 관계라면 반대하고 막아도 소용없다는 태도였다. 애정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든 상황에 “괜찮아”로 응답하는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교사로 일하며 학교폭력을 담당했고, 8년간 학부모 민원과 사건에 시달려왔다고 했다. 무자비한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로 느껴지는 감정을 무디게 묻어버린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도 허용해야 한다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남편은 일을 선택했고, 출장을 다녔고, 방해받지 않을 시간이 필요했다. 원하는 자리를 얻었고, 그 자리는 높고 단단했다. 가정에 소홀해도, 내 의견을 무시해도 나는 견뎌야 했다.

나약한 감정에 기대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자.

‘어차피 이혼을 하면 지금보다 더 힘든 조건으로 살아야 할 텐데.’

내 감정을 묻어두고, 단단하게 정신을 붙들어줄 주문처럼 이렇게 결론 내렸다.

최대한 상처 입지 않는 방법을 택하자.
감정은 어차피 변하니까, 납득할 만한 논리만 만들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감정과 의견은 더 꽁꽁 싸서 숨겨야 했다.


주변에서도 “함께 있으면 싸우기만 하니 야근 수당이나 더 벌어오는 게 낫다”는 말을 쉽게 했다.

나는 아이를 돌보며 직장에서 자리를 잃었고, 사회적 지위도 함께 사라졌다. 경제력은 없었고, 남편에게 의존해야만 살 수 있었다. 그 시기의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렇게 눌러 묻어둔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억누른 감정의 앙금은 그대로 내면의 바닥에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단단함’이라고 착각한 채 오래 살아왔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알게 되었다.
나는 그토록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걸. 나의 역사와 취향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싶은 욕구가 한 줌 정도 내 속에 남아 있었다. 상처 입어도 견딜 수 있었던 내면의 조각.

단단해지기 위해 감정을 버리는 선택은 나를 보호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나를 더 고립시키고 있었다.

힘겹더라도 싸움을 시작해 보자. 키아누리브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사랑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어떤 종류 사랑을 가진 거냐고 'If you don't fight for love, what kind of love do you have?'

희망적으로 쓰고 자기 계발서 같은 결론을 짓고 시작을 응원하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결론이 허술해도 한 발은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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