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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Jul 21. 2020

어차피 가는 길 고행처럼 가지 말고 여행처럼 가보자

1. 미지의 세계로 발을 담그다

몇 년 전 남편의  40년의 이민생활의 고향이었던 정든 모든 것이 있던 캘리포니아를 등지고 전혀 새로운 맨땅의 헤딩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아는 것도 아는 사람도 없는 전혀 다른 정서와  다른 방향인 이 곳에 자리를 잡았다.

40년의 익숙한 곳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했던 남편은 전혀 다른 곳인 그리고 부모도 형제도 없는 이 곳에서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자기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존심도 버리고 그야말로 막일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루아침에  결정을 내릴 수 없어 많은 고민 끝에 일단 혼자 먼저 가 보고 나서 결정을 하자고 하고 남편을 먼저 보냈다.

남편은 일주일 후 완전히 마음을 굳힌 후 내게 전화로 자신의 결심을 통보하였다. 그 당시 엘에이는 100년 만의 가뭄이 생겨 도시가 온통 메마름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건조하게 만들 정도로 비가 내리지를 않았다. 남편의 결정에 한몫을 단단히 거든 그곳의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시원시원 스러운  빗줄기가 아마도 자신의 결심의 큰 몫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은 그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가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터전으로 정착하기에는 꺼려지는 이유이기도 한 데 사람은 자신의 결정에 어떤 이유라도 끼워 맞추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는가 보다.  

나의 고민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의 통보 이후 나의 터전과 내 아이들에게 불어올 변화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들과의 익숙함으로부터의 이별을 생각해 보아야 했다.

큰 아들은 사춘기의 정점에 들어서 있는 소위 말하는 무적의 중학생 시절이었고 그 나머지 아이들은 그나마 새로운 변화에 어느 정도 변화를 주어도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보였지만 지금의 터전을 버리고 미련 없이 가 버리기엔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세 형님들과의 관계도 훌훌 털고 갈 정도로 소원하지도 않았고 미국 생활을 하면서 형님들과의 일상은 내게 많은 위로와 위안을 주었기에 그들과 앞으로 헤어져 나만의 일상이 그다지 반갑게 여겨지지도 않을 정도로 네 명의 동서지간은 잘 지내고 있었기에 이 점도 나에게는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터가 명백하게 정해진 것도 아니라서 이 곳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 가족이 움직이기엔 모험을 가장한 무모함에 가까웠기에 나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머리가 아파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결단을  내리고 나니 간단해졌다. 이유는 단 하나.. 가족은 무조건 함께 가야 한다는 것.. 비록 그 길이 험하고 쉽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결정을 통보하고 나서 큰 형님의 주도하에 시부모님을 비롯해 전 가족이 다 모여 이별 파티를 하는 자리에 형님은 한 번 더 나를 말렸다. 이유는 부모 형제와 근 40년을 둥지로 틀고 산 곳을 떠나 아무것도 결정된 것도 없는 곳을 혼자도 아닌 가족들을 다 대동하고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일이라고 아이들과 동서는 가지 말고 삼촌 혼자만 보내보라는 것이었다.

나의 대답은 단단하고 짧았다.

비록 지금의 결정이 무모하고 틀릴지 모르지만 같이 가는 것이 맞다고, 비록 다시 실패하고 돌아올지라도 일단 다 같이 가는 것이 맞는 거 같다고....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지만  인생의 길이 항상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다른 길을 걸어가 보는 것도 내 인생에 그다지 낭비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 길 또한 내 인생의 한 갈래  길이기에...


길 위의 여정이 시작되다


모든 짐 꾸리기가 정리되고 난 후 남편은 이른 새벽부터 차 뒤에 연결되어 있는 트레일러에  필요한 이삿짐을 제한된 공간에 하나라도 더 넣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한국 사람들도 제법 사는 곳이라 필요한 물건들을 얼마든지 구 할 수도 있지만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다 쌓아놓다 보니 제법 작지 않은 이삿짐이 되어버렸다. 그냥 버리고 가도 아깝지 않을 잡다구래한 물건들이 하나 둘 쌓아 올려지면서 버거워 보이는  이 물건들을 책임지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날라야 하는 자그마한 자동차가 그나마  우리 가족의 소중한 재산이다. 자기 몸뚱이의 두 배가 넘는 짐을 싣고 이제부터 달려야 하는 고단한 여행이 시작될 것을 생각하니 내가 그 차로 빙의된 것 같아 갑자기 그  작은 몸뚱이가 애처로워 보였다. 마치 내 인생을 보는 거 마냥...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시어머니는 창 밖을 통해 막내아들의  초라한 이삿짐이 차곡차곡 실어지고 있는 순간들을 눈으로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  있었지만 직접 나와보지는 않으셨다. 그 마음을 누가 알까 다른 세 아들과 달리 부모 형제가 있는 이 곳에서도 안정되게 정착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불안하고 보장되지 않는 곳으로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온 가족을 데리고 떠나는 초로의 막내아들이 선택한 그 믿음직스럽지 못한 결정에 말릴 수도 없는 그 먹먹한 당신의 마음을...

 짐이 다 꾸려지고 남편은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우리들을 모두 차에 타라고 하였다. 그제야 어머니의 늙은 몸이 서서히 아픈 다리를  이끌고 내려오셨다. 큰형과 둘째 형님이 작별인사를 하려고 집으로 들렸고 큰 형님은 일을 해서 올 수가 없다고 전화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그 와중에 갔다가 아니면 바로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와 함께 형을 통해 가서 작은 가구라도 새로 장만하라고 적지 않은 노자돈을  전해 받고 나서 작별인사를 하고 난 후 차에 올라타자마자 트레일러의 짐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집에서 5분 정도 지날 무렵 트레일러가 차에서 어져 나가 움직이질 않는다. 동네를 벗어나기도 전에 차는 멈추었다.  남편은 다시 차에서 내려 무려 1시간을 점검하고 트레일러를 안전하게 연결시킨 뒤 다시 출발한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우리들 쪽으로 시선이 모여진다. 나와 아이들은  왠지 우리들의 삶이 벗겨져 버린 것 같은 이 당혹감에서 이 곳을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온몸이 부끄러움으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자동차 백미러 사이로 보이는 뒷좌석에 커다란  수건으로 신의 얼굴을 감싸고 차가 고쳐지고 난 후  동네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그 커다란 수건은 아들의 얼굴에서 벗겨지지 않았다.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수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차는 그동안 수도 없이 오가던 익숙한 5번 프리웨이를 지나 앞으로 이어질 길을 향해 질주해 나가고 있었다. 낯익은 동네를  벗어나자 아들의 수건이 드디어 벗겨지면서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사귄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또다시 힘들게 겪어야 할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기에는 부모의 삶이 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체념이 어우러진 아들의 붉어진 얼굴에는 13살 어린 아들의 감정으로는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 뒤로 또 다른 희망이 생길 거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하고 가슴속으로만 삼키고 묵묵히 차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2. 의도치 않은 대륙횡단이 시작되다 

결혼 전에 남편은 미국에 들어오면 꼭 동서대륙횡단을 시켜 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생의 성장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난 이후에 거진 35년 이상을 보낸 미국에 살면서 돌아다닌 곳 중에 거의 모든 자연의 총집합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이 가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웠던 옐로 스톤을 꼭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그 약속은 고단한 삶에 치여 언제 적 이야긴지도 모르게 흘러 지나가고 있었고 어이없게도  결혼생활 중의  10년이 훌쩍 지나고 삶의 터전을 옮기는 과정에서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택한 여정의  일정 중에 코스의 어려움으로 옐로스톤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과정은 들어가는 경비도 만만치가 않았다.  우선 짐을 옮기는 이사비용만으로도 거의  만불이 들어가는 경우라서 나는 다른 묘안을 찾아보았다. 마침 아이들에게는 여름방학 기간이라 시간적인 제한은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었기에 비용도 절감하면서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심한 끝에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평소 다른 거는 신기하리 마치 맞는 것이 없는  우리 부부가 유일하게 맞장구쳐질 때가 여행 스타일이다. 항상 즉흥적으로 여행의 일정을 짜고 현지에서 모든 계획이 세월 질 정도로 무계획의 무모함으로 여행의 순간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철저히 계획된 여행의 잘 짜인 느낌은 없지만 알지 못했던 새로운 희열을 느끼게 해 주는 여행 방식이라 로드트립의 또 다른 묘미를 가져다 주기도 해서 우리 부부가 선호하는 여행 방식이다. 그래서 어차피 가는 길 고행처럼 가지 말고 여행처럼 가보자 하고 그렇게 7박 8일의 길 위에서의 기나긴 여정인 대륙횡단의 로드트립이 시작되었다. 

두려움이 설렘으로 바뀌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차는 어느새 정든 캘리포니아를 빠져나와 첫 번째 목적지인 자연의 보고인 그랜드 캐년을 필두로 세계적인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애리조나주를 향하여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차는 서서히 고속도를 빠져나와 한낮의 열기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저녁 무렵에  사막의 가운데 있는 애리조나의 주도이자  사막의 도시 피닉스로 들어선다. 우리가 하루를 묵어갈 모텔에 도착하여 짐을 푼다.

여름 내내 100도를  웃도는 뜨거운 더위는 도저히 밖에 잠시라도 서 있기가 두려워 서둘러 짐을 챙기고  에어컨이 온몸이 떨릴 정도로 빵빵이 틀어져 있는 실내로 재빨리 들어간다.


3. 세상에서 가장 센 기를 가진 세도나에서 기를 받다

지난밤 몸과 정신의 고단함으로 모텔로 들어서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뻗어버린 나와 달리 남편은 저녁을 먹고 난 후 다시 트레일러를 점검하러 나갔다.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짐을 뒤에 매달고 쉼 없이 달려온 고단한 작은 몸의 열기를 식히고 있는 자동차와 트레일러를 분리시켜놓고 이삿짐이 안전하게 놓여있는지 확인을 한 후 돌아와 깊은 잠에 빠졌다.

이른 아침 낯선 곳에서의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밖은 이미 뜨거운 열기로 콘크리트 바닥을 달구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느긋하게 아침을 시작하면서 오늘의 일정을 의논했다.  미리 이 곳 저곳 알아본 자료를 토대로 미국에서 가장 쉽게 떠오르는 그랜드 캐년을 돌아보고 난 후 다시 새도나를 갈 것인지를 결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는 동선이 딱딱 떨어지는 위치가 아니라서 일단은 피닉스에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세도나를 먼저 가 보기로 했다.

 서부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가 봤을 세도나의 초입에 들어서면서 세도나를 상징하는 불그스름한 거대한 바위산인  벨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센 기를 가졌다는 세도나에서도 가장 센 기를 발산한다는 벨락이다. 이 곳에서 유명한 한국 메이저리거 야구선수도 기치료를 하기 위해 들렀던 곳이기도 하단다.

내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사막이라 물이 귀할 줄 알았던 바와는 다르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두 곳이 있어 우선적으로 찾아가 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자연이 만들어 낸 물놀이 공원 슬라이드 락 주립 공원

주변 환경상 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과연 자료에서 본 그 사진 속의 놀이 공원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찾아 간 이 곳은 세도나 안에 위치하고 있는 주립공원 안에 있었다.

공원 안에 들어서서 꽤 많은 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이 천연 물놀이 공원은 들어가는 곳곳이 장관이다.

한쪽은 사암 괴석으로 병풍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멋진 휴식처를 만들어 주고 그 옆으로 길게 늘어진 시원스럽게 흘러내리는  계곡은 상류에서 시작된 곳곳에 자연스럽게 미끄럼틀이 만들어져  반질 반질 달은 바위가 자연적으로 슬라이드를 형성한 물놀이 공원이다.

상류에서부터 시작해서 타고 내려가는 과정은 제법 빠른 물살에 스릴만점이다. 이미 상류부터 차례차례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계곡은 꽉 차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어디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가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소가  달구지에 묶여 끌려가듯이 멍한 표정으로 가는 대로 실려 피곤과 함께 아직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던 아이들의 얼굴에 조금씩 호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직 뭣도 모르는 8살 막내는 물을 자마자 잽싸게 줄을 스기 위해 곡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딸이 내려가고..

여전히 얼굴에 불만스러움이 가셔지지 않은 큰아들은 멀찌감치 자리를 잡고 물가로 내려갈 생각도 앉고 뚝뚝하게 아만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입을 다물었다. 어제의 피곤함과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부모들은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 막내가 물에서 나와 올라왔다 내려갔다를 반복한다 물은 이 더위를 삭히고도 남을 정도로 차가워서 오래 물속에 있지를 해서 몸을 덥히기 위해서 나왔다 몸이 조금이라도 더워지면 다시 들어가곤 하였다.

 아이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재미나다고 또다시 내려가 계곡을 타기를 반복한다. 큰애도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이윽고 몸을 움직여 계곡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내려갔다.

수영복이 미끄러운 바위의 마찰에 구멍이 나고 나서야 아이들은 물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몸은 이미 허기가 져서 먹을 것을 찾았다. 간단한 음료와 과일로 요기를 하고 서둘러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석양의 노을이 장관인 크레센트 문 랜치

세도나에서 두 번째로 도착한 이 곳은 계곡물 위로 비추는 웅장한 대성당 바위가 석양이 드리우면서 물가에 비추는 명장관을 뽐내는 아주 유명한 장소이다.

그래서 이 장관을 사진으로 담아내려고 많은 사진작가들이 석양이 지기 전부터 삼삼오오 물가로 몰려들어 각자의 삼각대를 가장 좋은 각도의 위치에 설치하기 위해 경쟁 아닌 경쟁을 하며 각자의 삼각대를 물가 위에 설치를 해 놓고 석양이 드리워질 그 순간을 멍하니 기다리는 모습도 꽤 인상적이다.

이 곳은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는 널찍한 피크닉 시설도 함께 구비되어 있어 편안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도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이 곳뿐만 아니라 미국의 많은 주립공원이나 국립공원은  가는 곳마다 이런 피크닉 시설들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우리는 항상 무식하리만치 많은 먹거리를 직접 준비해서 다니기 때문에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않아도 가볍게 이곳저곳 다닐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워낙 캠핑이나 여행을 좋아하는 큰형님네 아이스박스는 웬만한 가정집 냉장고만하다. 그 안에 빼곡히 들어앉아 있는 각종 한국 음식들은 여행의 주된 과정 중의 하나이자 빠질 수 없는 재미다. 그래서 형님과의 가족여행은 우리 집안 누구에게도 언제나 서서히환영받는 행사다.

차를 주차하자마자 짐을 피크닉 장소에 풀어놓고 아이들을 위해 남편은  갈비를 구울 준비를 하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쌀을 씻어 밥을 얹어 놓고 잠깐 계곡을 둘러보기 위해 숲길을 따라 들어가 보았다.

양쪽으로 나 있는 숲으로 오솔길 같은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길 한쪽으로 계곡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좀 더 들어가 보면 자연의 보석이 숨어 있다 빛을 발하듯이 전혀 예기치 못한 광경이 드러난다... 넓은 원형 같은 웅덩이 위로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는 대성당 바위가 밑에 잔잔하게 흐르는  계곡물과의 묘한 조화를 이루고 그곳에 우뚝 솟아 있었다. 아직 해 질 무렵이 되지 않아서 석양의 장관은 볼 수가 없어 일단  돌아가  식사를 하고 다시 오기로 하고 발길을 돌린다.

밥과 김치와 갈비로 채워진 늦은 점심은 우리가 엘에이를 출발한 지  만 하루 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식사다.

아이들은 밥을 먹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건 하나씩을 챙겨 물가로 뛰어간다. 남편과 나는 뒷정리를 하고 나서 아이들 뒤를 이어 물가를 향해 걸어갔다. 가는 곳마다 다 절경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그 어떤 인간의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냥 직접 와서 온 몸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다. 같은 모습을 보고도 얼마나 다양한 느낌으로 와 닿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 평화롭다.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 일정을 통틀어 항상 몸에 일부처럼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 있는데 이 폼이 마치  영락없는그 옛날 일수 찍는 아줌마의 모습이다. 어디를 가든 이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데 여행의 특성상 우리 가족의 전재산을 다 챙겨 다녀야 하는데 남편 몰래 항상 비상금을 모아 놓은  지폐 덩어리가 문제였다. 항상 돈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남편 덕에 몰래 모아놓지 않으면 미국 생활에서 큰돈 들어갈 때 정말 막막하다. 특히 아이들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 변명 같지만 비상금은 나에게는 필요한 딴주머니인 거다.

이번에도 역시나 가방을 메고 숲을 헤치고 물가로 들어간다. 

이미 사진의 각도가 훌륭하게 나올 장소인 명당자리에 사진작가 인듯한 남자가 자신의 삼각대를 물속에 넣어놓고 이리저리 각도를 맞추며 석양이 드리워 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물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유유자적하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물 건너편에는 거대한 평평한 바위가 놓여 있는데 그곳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광경이다.

남편도 아이들과 합류하여 시원한 물줄기 속에서 처음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바라보는 물가는 좋아하지만 직접 들어가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명장면을 선사하기 위해 사진작가 옆에 자리 잡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갔다.

사진을 찍으려면 어쨌든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물속은 얼음물처럼 차갑고 맑았다.

군데군데 돌멩이들은 물이끼 때문인지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만치 미끄러웠다. 혹시나 가방 속의 지폐 덩어리들이 젖을까 가방에 힘을 꽉 주고 서 있었다.

드디어 서서히 붉은빛 석양이 서서히 물줄기 위를 비추기 시작하고 물가는 점점 어두운 밤의 색으로 변하려 하고 머리 위 거대한 바위는 서서히 붉은 기운으로 몸 전체를 덮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들이 눌려지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때인가 보다.

나도 이에 질세라 아이들이 있는 곳을 눈으로 따라가며 사진기를 누르기 시작한다. 한 장은 건지겠지...

좀 더 욕심을 내어 아이들이 있는 가까운 곳으로 올라가 보니 물살은 생각보다 빠르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그마저도 가파른 역류다. 가방은 겨드랑이로 꽉 끼고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다가 순식간에 물속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누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가관도 아녔을 것이다. 물속에서 마저 돈가방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이들이 물에서 빠져나와 나를 향해 오면서 엄마가 괞챦은지 물어보고 딸과 막내는 급류에 쓸려 간 내 한쪽 신발을 찾으러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갔고 큰 아들은 그런 내 모습이 창피한지 잽싸게 물에서  빠져나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숲 속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카메라는 물에 젖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물에 쓸려 내려간 신발은 결국 지 못하고 뚜벅뚜벅 걸어가

돌아오니 천연덕스럽게 앉아 먹고 있는 남편과 큰 아들이 보였다. 화가 나고 괘씸했지만 말할 기운도 없어 먼발치에 혼자 떨어져 앉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어두워 물속이 컴컴할 때까지 아이들과 남편은 물에서 나올 줄을 몰랐고 사방이 조용해지기 시작할 때 물에서 나와 모텔로 돌아왔다.

모텔로 돌아와 정리한 후 사진을 확인 해 보니 과연 작품이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미끄러진 다리가 푹푹 쑤신다...

4. 가도 가도 끝없는 황야의 사막 텍사스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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