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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Jul 29. 2020

어차피 가는 길 고행처럼 가지 말고 여행처럼 가보자

6. 미시시피 강을 따라 앨라바마로 가다

집을 떠나  주 거쳐오면서 그나마 감사하게도 멋진  볼거리 좋은 먹거리로 가는 동안만이라도 앞으로 벌어질 미래의 불안감에서 잠시라도 해방될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여행 중의 백미였던 문화의 도시 뉴올리언스를 떠나오면서 이제 우리 가족이 정착해야 할 마지막 종착지로 쉼 없이 달려야 한다. 앞으로 6시간 후면 다가올 우리들의 삶의 터전....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잠깐이면 될 줄 알았던 멕시코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우리 가족은 5년간 이별 아닌 이별을 하고 살아야 했다.

두 아이의 육아는 오롯이 나만의 문제가 되었고 남편은 주말이 되어서야 미국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돌아왔다. 차도 없고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이 주중의 모든 시간들을 연년생 터울인 아이들의 기저귀를 번갈아 채우는 일로 그 단조로운 시간들을 견뎌냈다. 금요일 오후 늦게 도착한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집은 비로소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다.  안에만 갇혀 지낸 아이들이 애처로워 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사방이 온통 바닷가인  바닷가 주변으로 콧바람을 쐬러 가는 것이 우리들의 유일한 바깥바람이었다. 잠시면 것 같았던 이 생활이 무려 5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 안에 말 못 하는 많은 사연들이 생겨났다.

5년이 흘러 드디어 미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신물 나는 강한 어조로 다시는 이 쪽으로는 화장실도 안 갈 거라고 다짐을 하고  모든 없던 정까지 다 떼고 그렇게 떠나왔다. 모든 고생이 끝나고 이제 행복할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성급한 기대는  비자를 기다리기 위해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남편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시작으로 앞으로의 고행이 시작될 거라고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남편은 전화통화로 일을 그만둘 거라 했고 나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한마디로 나를 안심시켰다.

왜 그때 난 남편을 말리지 못했을까? 나의 문제는 항상 남편을 너무 믿는다는 것이었다. 속고 또 기회를 주고 또 기회를 주어도 항상 나는 남편을 믿었다. 아님 그렇게 믿음으로써 그 안에 안주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정리되어 드디어 미국으로 들어오던 날에도 나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남편의 터전인데 어떻게 되겠지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그 날의 전화통화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간히 아는 형의 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온전한 일을 잡지 못했다.

미국에 들어오면 괜찮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내 기대는 점점 불안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유일하게 남편에게 요구했던 건 단 한 가지 아이들을 위해서 학군 좋은 곳에 정착하는 이었고 나의 요구에 맞춰  남가주에서 학군 좋기로 소문난 곳으로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동네는 어렴풋이 봐도 깨끗하고 좋아 보여서 좋았지만 예상대로 렌트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집값은 바닥으로 치닫고 있던 상태라 우리 버짓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에 집이 나와 그리로 이사를 하면서 미국 생활을 이 곳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본 반쪽짜리 남편과 온전한 남편과의 괴리는 실로 엄청나게 컸다.

미국 생활이 그렇듯이 미국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구조라 한두 달 정도 수입이 없으면 생활의 쪼들림이 말할 수 없이 견디기 힘든 구조다. 그런데 남편은 뒷주머니에 돈주머니를 달아 논 사람처럼 일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근 1년이 넘어 2년이 다 돼가는데도......

중간중간 아는 사람의 회사에서 일을 해서 겨우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지만 아이 셋을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은 아무리 먹고 입고하는 기본적인 것만 해결을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의 비자금이 한 번 두 번 서서히 생활비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가 이쯤부터였던 거 같다. 아이들을 굶길 수는 없어 결국은 나의 비자금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성수기 중의  성수기에 돈이 필요해 한국까지 가는 일까지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쯤에  남편에 대한 나의 분노는 터지기 일보직전이었고 아직도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 날... 나의 분노는 강한 욕설로 남편을 행해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가 없어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했지만 아이들 둘이 이미 학교에 다니기 시작해 아이들을 방과 후에 데리고 와야 하는데 갓난쟁이 막내아들이 단잠을 자고 있었다. 자는 아이를  덜렁 유모차에 태워 집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학교에 걸어갔다. 그런데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비가 아져 내렸다. 패다!!!

삼삼오오 부모의 차를 타고 떠나는 아이들 속에서 우리만 남았다. 기다려도 비는 도저히 그칠 것 같지 않아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아이 셋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그 빗속을 그 넓은 길에 우리 4 사람만이 그 비를 온몸으로 맞고 걸어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어떤 이는 창문을 열고 우리들을 태워줄 테니 차에 타라 했지만 번거로움에 정중히 거절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도저히 아이들을 볼 수가 없었다. 비에 젖은 생쥐처럼 세상 처량하게 걸어가는 아이들을 차마 볼 자신이 없었다.

학교 앞에서부터 집으로 가기까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던 큰 아들의 모습에서  이제껏 꾹꾹 눌렀던 나의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날 우리 모두 심한 감기를 알아야 했다. 그러나 심한 감기보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나에게는 새겨졌다. 그 날 이후 남편의 무능과 무책임한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더 이상 참아지지가 않았다.

짐을 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편도행 비행기를 끊고 한국행 비행기에  다.

내 아버지의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었고 가장 사랑하는 딸의 실패에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세상의 자기 자식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을까? 내 자식을 살리고 봐야겠다고 강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힘없는 아버지는 나를 위로했다. 나의 아버지는 항상 그랬다.

가진 것보다 더 주고 싶어 했고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태세지만 그 의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힘없음에 또 슬퍼하는 그런 아버지였다. 평생을 딸의 자랑스러움으로 살아온 나의 아버지의 사랑을 또 그 끝없는 사랑을 방패 삼아 세상을 상대로 당당하게 살아온  내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하려고 서초동 법원을 들러 서류를 가지고 오는 버스 안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나의 실패를 인정하는 이 종이 쪼가리 하나에 사인만 하면 나는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서류를 들고 집에 돌아오자 나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한국으로 들어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아빠라는 단어 하나를 입에 오르내리질 않는다. 유독 아빠를 잘 따르던 아이였다.

밤이 되어 자려고 돌아누우니 작은 아들의 등 뒤로 나지막이 들려오는 소리...

아빠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 봐... 인제 아빠 없이 사는 거야.. 혼잣말로 하는 두 살짜리 아이의 소리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시간이 흘러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안 되겠냐고 도저히 아이들과 내가 옆에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소리에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아이들의 아버지로만 인정하기로 하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간다.

 나는 50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도 나의 아버지가 없이는 살 수가 없는 딸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의 아이들에게 반쪽짜리 아빠 없는 불행한 아이들로 만들고 싶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능력 없는 남편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남편이었으니 세상의 잣대로 보면 돈 못 벌어 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혼을 하게 되는 세상 나쁜 여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건 아니지 싶었다. 사실 남편은 능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그 자존심 하나로 처자식을 지에 몰아놓고 있는 것이 나는 더 괘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는 을 싸고 아이들과 미국을 들어가려는 나에게 짐뺏으면서 지금은 일단  간단하게 가고 여차하면 다시 나올 경우를 생각해 나머지 은 놓고 가라고 했다.. 그 들은 아직도 내 친정집에 그대로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단지 아이들의 부모로서 책임을 지기 위해 그 고단한 비행기에 또 몸을 실었다.

갈 곳 없어 늙은 노모의 집에 얹혀 있던 남편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이젠 그나마도 변변한 한 칸도 없이 노모의 구박을 받으며 하루하루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형의 아파트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더불살이 아닌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다 내려놓으니 간간히 나오는 눈물 빼고는 마음은 편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거라곤 빈 껍데기뿐인 자존심과 언제든 상황이 역전되면 삐집고 나올 자신감만 남았다.

병은 참을 만큼 참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폭발하는 것인가?

다 내려놓으니 이번엔 꾸역꾸역 잘도 참았던 내 몸이 내 안에 쌓여있던 스트레스 덩어리들을 마구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공황장애를 가지고 나는 지금 이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앨라배마 어번이란 곳이었다. 이 곳은 큰 대학 하나를 중심으로 생긴 대학도시다.  남편이 미리 렌트해 놓은 곳으로 들어서니 난감한 일이 생겼다. 그전에 렌트를 했던 대학생이 아직 방을 빼지 않은 것이다. 3일 이후에 나간단다. 백한 계약 위반이지만 우린 갈 데가 없는 을의 입장이다.

하는 수 없이 일단 트레일러 이라도 내려놓을 곳을 알아봐 달라 하니 자신의 다른 소유지로 가서 트레일러를 주차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오다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마지막까지 마침표를 찍자고 남편에게 플로리다로 그냥 가자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천국인 플로리다에서 이제껏 우리에게나 여행이라 할 수 있지 아이들에게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고행이었지 않나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된 거 그냥 플로리다로 가자고 했다. 찾아보니 호텔 체인에서 하는 프로모션이 있어서 포인트도 주고 돈도 준다니 그 프로모션을 이용하면 돈도 절약될 것 같으니 그렇게 하자 하고 앨라배마에서 머무는 대신에 플로리다로 가기로 했다...

마침표를 찍으러 플로리다로 간다.

 아이들에게는 그동안의 고행에 대한 보상으로  휴식을 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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