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대중교통이 아직 개통되기도 전에 엘에이에서 도착하는 비행기가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나는 새벽 4시에 공항으로 향해야 했다.
불 같이 화를 냈던 오빠가 새벽에 나를 공항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오빠는 불 같이 화를 내는 대신 미지의 세계 속에 자신의 인생을 내걸고 있는 자신과는 다른 동생의 대범함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의 운에 한 번 더 인생을 걸어보자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동생의 행동에 화를 내기보다는 이번에는 차분하게 동생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결정을 하든, 나의 결정에 따라주는 든든한 동지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냉정하고 차가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형제애를 보여주었던 나의 오빠!!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비록 자신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결정에 따라주며 같은 길을 가 주는 것...
그 순간에 자신의 동생이 얼마나 애처롭고 불안했을까?
그러나 결과에 상관없이 격려해 주고 지지해주는 나의 동지가 나의 곁에는 항상 있었다.
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미쳐있을 때, 나의 가족들은 항상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나의 그 격정적인 그 미친 감정들이 사그라들어 이성으로 돌아올 때 까지를....
새벽 6시 30분 엘에이 발 비행기가 이미 도착했다는 표시가 전광판에 들어왔다.
떨리기 시작했다. 컴퓨터 안에서만 만났던 사이버 커플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내가 포샵을 너무 많이 해서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내가 상상했던 그 사람이 아니면 비행기표를 물어줘야 하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사진 속의 배우 같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ㅎㅎㅎㅎ
그런데 속속들이 빠져나가는 무리들 중에 익숙한 느낌의 한 남자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역시 그도 나를 알아본 눈치다.
어색한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입술이 경직될 정도로 어색한 웃음을 교환하고 그는 내 눈 앞에 들어왔다.
사진 속의 샤프한 사람은 어디로 가고 인상 좋은 아저씨가 내 눈에 들어왔다.
사진보다 훨씬 더 인상이 좋아 보였다. 좀 더 늙어 보이는 느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도 엄청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건 무엇일까?
나는 교수님이 나오는 줄 알았다. 분위기가 그랬다.
점쟎고 선비 같은 중후한 멋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도도하고 까칠한 여자인 나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짐을 공항 안에 맡기기 위해서 짐을 보관하는 곳으로 갔다.
짐을 맡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인천에서 가까운 월미도로 향했다.
횟집으로 들어가 본격전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눌한 말투의 이 사람
어쩜 채팅할 당시의 그 사람과 100프로 싱크로율이다.
느린 듯 여유 있고 어눌한 듯 선비 같은 인상이 딱 들어맞았다.
채팅과는 담 싸고 살 듯한 두 사람이 사이버에서 만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색함은 사라지고 다시 사이버 안에서의 사이처럼 편해졌다.
추석이 시작되기 전 연휴가 시작되는 시점이라서 대중교통은 엄청 혼란스러운 날이었다.
밤이 되어 헤어질 시간이 되자 공항으로 돌아가 짐을 찾아서 서로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시간..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보니 눈이 고프다고 말했던 이 남자의 모습에서 나는 진정성을 보았다.
그는 눈이 고팠는지 모르지만, 나는 눈이 삐었다. 나중에 그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자기도 눈이 삐었나 보다고 ㅎㅎ, 결론은 눈이 삐어야 운명이 보이나 보다.
꼬박 이틀을 세우고 있는 사람!!!
나를 보러 오기 위해서 이틀을 꼬박 새우고 감기는 눈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진주로 가기 위해 표를 알아보았지만, 이미 만석이라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힘겹게 온 사람을 두고 나 혼자 가기가 망설여지자, 자기는 걸어서 가든 어떻게든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하기사 그 등치로 누구에게 끌려갈 것 같진 않았다.
헤어지기 전에 걱정이 되어 잘 도착했는지 꼭 연락하라고 말하고,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떨림보다는 편안함이 주는 만남이었다.
추석을 맞아 포도를 사러 포도농장에 있을 무렵, 이른 아침에 전화벨이 울렸다.
어제 만난 그였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어제 집에 도착하면 전화를 하라고 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하는 거라고...
마산행 버스를 타고 겨우 진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이른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운명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왔던 그는, 가족이라는 거대한 짐을 안고 다시 그 공항을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오!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