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를 가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오다.

by kseniya

모든 인생에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브레이크 없이 달리던 나의 일도 서서히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예전의 숨 막히게 바쁘던 일상에서 여유롭다 못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가해질 때도 있었다.

이렇듯 피부로 느낄 정도로 일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러시아에서도 우리나라의 IMF 같은 모라토리움이 터진 것이었다.

이 말은 즉 러시아의 화폐인 루블화의 가치가 떨어져 달러가 오르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달러 거래를 하던 상인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자신들의 화폐를 달러로 바꾸려면 그 환율 차이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감이 줄어드니 평상시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다니지도 못했던 것들을 구경하러 이 사무실 저 사무실 다니는 여유까지도 생겨났다.

그런데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은 러시아 상인들에게만 피해가 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과 거래했던 많은 회사들과 공장들에게도 불통이 튀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돈이 물리고 물린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위기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러시아 상인들로 북적대던 그 지역은 한산하니 전혀 다른 거리가 되어 있었다.


한가한 오후에 원 사장이 찾아왔다.

시장조사도 할 겸 그곳의 분위기가 어떤지 모스크바를 같이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사실 나 또한 그렇게 바쁜 것도 없었고, 실제로 러시아 국내 사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 그쪽 사정을 보고 사업의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원 사장과 모스크바를 같이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나의 아버지를 대동하고.... 울 아버진 무슨 복일까?


같이 일하는 김 부장님과 동행한 원 사장님과 나의 아버지 이렇게 네 명이서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탔다.

이미 만석인 비행기 안은 자리가 꽉 차서 일반석이 모자를 정도가 되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좌석이 업그레이드가 되어 비즈니스석을 타고 모스크바를 가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타 보는 비즈니스석이었다. 일반석에서 보는 시각과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뒷자리에 놓여있는 와인과 과일안주들..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항상 비축되어 있었다. 돈의 힘이 느껴졌다..

돈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질....

나에게는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편하다는 느낌 외에는 말이다.

왜 그때 나는 돈의 현실을 몰랐을까? 돈이 가져다주는 그 안락함과 현실을 왜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을까?

아직 어린 나는 아직도 환상을 가진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때 조금만 더 돈의 현실을 인식했다면 지금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가는 내내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는 서서히 사업을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못다 이룬 나의 꿈이 서서히 다시 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각이 많아졌다.

나 자신도 믿기지 않는 내가 지나온 길, 그 길에 분명 나는 신의 가호가 있었다.

도저히 나 혼자서 이런 일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므로....

가는 곳곳마다 위기의 순간들마다 나를 보호해 주던 보이지 않는 힘의 순간들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준비된 배 위에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항해를 성공적으로 이루었지만 그 배를 적당한 시기에 내려와야 하는 것도 온전히 나의 결단에 달려있었다.

장시간에 걸친 비행기가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세계적인 도시치고는 화려하지 않은 예의 러시아스러운 어두운 거대한 공항을 빠져나와 호텔로 가는 택시를 탔다.


러시아 땅을 밟은 지 2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러시아 땅을 밟았다.

러시아의 그 광활한 땅의 끝인 시베리아의 극동지역에서 유럽에 가까이 위치한 모스크바까지....

단돈 만원을 손에 움켜쥐고 불확실한 미래에 절망하던 내가 지금 거대한 세계의 도시!

나의 꿈의 도시 모스크바에 있는 것이다.

내 앞에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있었다.

어느 한 날 취업을 준비하던 여대생이 나를 보고 자신의 로망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이미 나는 누군가의 로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