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 좋고 물도 좋지만 역시 사람이더라
본격적인 나의 멕시코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격적인 사고 후, 마음을 추스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일주일이 지났다. 남편은 이렇게 계속 남의 신세를 질 수 없다면서 그 사이 집을 보러 다녔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젊은 목사님 집에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 염치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집이나 우리 집이나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로 같은 집에서 긴 시간을 지내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우리 가족이 살아야 할 집을 둘러보기 위해 추슬러지지 않은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한국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을 최우선으로 생각을 하며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하숙집 근처에 모여있었다. 그 하숙집을 기점으로 해서 한국에서 오는 주재원들을 비롯해멕시코 교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동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삼성이나 한국의 대기업을 비롯해 그 주변의 협력업체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이곳으로 단기 출장을 오는 직원들은 이곳의 하숙집에서 머물기도 했고, 그 외에 장기간 주재원으로 가족들과 함께 오는 집 역시 이곳을 벗어나지는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이곳에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멕시코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하숙집에서의 한 달간의 기억이 너무나도 싫어 그곳을 피해 남들이 가지 않던 곳을 골라서 갔었는데... 마치 부메랑처럼 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을 당한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사람의 생명이 오고 가고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을 경험하고 나니, 좋은 경관도 필요 없었고, 으리으리한 깨끗한 집도 다 필요 없었다. 단지 나와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안전하게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와 왕래가 있었던 교회 사람들과 아이 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이곳을 추천한 이유도 혼자서 외로이 떨어져 아이 키우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 모여 있는 이곳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이곳저곳 무조건 한국 사람들이 있는 곳을 골라 집들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남편은 자신이 항상 같이 있어 줄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점에 신경을 써서 집을 보러 다녔다.
급하게 집을 보러 다니던 중에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평상시 누나라고 따르던 동생 같은 청년이 자신이 살고 있는 대단위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한 번 알아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곳을 남편과 함께 찾아갔다.
한 달 렌트비가 250불 정도인 스물 동이 넘는 아파트는 들어가는 입구가 게이트로 되어 있었다. 게이트 옆에는 따로 아파트를 관리하는 오피스가 있었다. 왠지 그 두 군데만 보아도 마음속에서는 벌써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넓은 땅 위에 드문 드문 세워져 있는 대단위 규모의 아파트 건물은 겉으로 보이기엔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특이하게 보이지도 않은 밋밋한 건물이 여기저기 중구난방처럼 서 있었다. 지은 지 꽤 된 것 마냥 다소 낡아 보였지만, 그런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곧바로 아파트 사무실에 들러 그 자리에서 비어있는 아파트를 보고 바로 계약을 해 버렸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단시간만에 해결이 되었다. 이미 비어있는 아파트라 당장이라도 입주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더 이상 따져볼 것도 없었다. 결국 이곳은 나의 가족이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멕시코를 떠나 올 때까지 우리의 둥지가 되어 주었다.
사고가 났던 그 집에서 가져온 세간살이들과 함께 남편은 분주하게 이사를 하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 봤자 아이들 이부자리와 아이들 장난감이 고작인 단출한 짐들이었지만, 막상 들고 오니 짐이 꽤 되었다. 물건들이 들여오고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순간에도, 나는 이삿짐을 옮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들고 오는 이삿짐들이 들어 오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터전이 옮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전히 신나게 새로운 곳을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 이유들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저 해맑다.
세간살이들이 옮겨 오고 새로운 집이 생기기 시작하니,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그 악몽들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밤만 되면 몸서리치게 그날들의 기억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고가 난 직후보다 시간이 흐른 사고 후 트라우마가 더 심하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내가 격고 나서야 그 후유증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사고의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나의 생활 전반을 괴롭히는 공황장애의 시작점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아이들과 남겨두고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다시 나는 아이들과 혼자 남겨졌다. 탁 트인 드 넓은 바다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또 아이들과 살아야 했다. 지친 몸과 하루가 멀다 하게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그날의 순간들과 매일 밤 싸워가면서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워지기는 커녕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날이 갈수록 더욱 생각이 났다. 그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어 하루하루 몸과 마음이 상해 있었다. 밤만 되면 나의 처지가 슬퍼 아이들을 재워놓고 작은 술잔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난 1년간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남편이라는 사람 하나만 믿고 멕시코로 들어온 이후로 심각하게 후회가 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편한 내 나라를 두고 이 무슨 짓인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내 처지가 더더욱 비참하게 느껴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사고 후, 일 년이라는 시간을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살고 있었다. 나 하나였으면 벌써 다 버리고 한국행을 택했겠지만, 어린아이들에게 아빠라는 부재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하나둘씩 나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무기력함 속에서도 사람들과의 왕래는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사를 오자마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인창이 언니가 나의 집을 방문하면서 서로 왕래하며 지내게 되었다.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같이 듣던 전도사 동생이 위로차 우리 집을 방문하고 난 후, 나를 따라 자기도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싶다며 정말로 이사를 와 버렸다. 미국에서 나의 소식을 듣고 예준네 식구도 일부러 멕시코를 넘어와 우리 집을 방문해 주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던 대학교에서 스페인어를 들으면서 알게 된 부산 언니는 이 주변에 살면서도 차가 없는 나를 위하여 반대편에 위치한 플라야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었다. 부산 언니 역시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자,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훨씬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거의 우리 집에 살다시피 할 정도로 자주 집으로 놀러 오곤 했다. 플라야에 여전히 살고 있는 영기 엄마와 병주 엄마 역시 나의 집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플라야에서도 아이들이 어려서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 집이 훨씬 편해서 항상 우리 집에서 사람들이 주로 모여들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한국 엄마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각종 루머와 멕시코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이 모여 퍼져나가는 멕시코의 사랑방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나의 멕시코 생활에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의 본격적인 멕시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