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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Aug 22. 2020

68년생 내 친구 김미자를 찾습니다.

맥심 커피의 소중한 향기를 찾아서

서대문구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내 어린 시절의 모든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름처럼 다소 촌스러운듯한 이 동네에서 나는 자라고 꿈을 먹고 시련도 안고 살았다.

교통이 편리해 사통팔달 다 연결되는 서대문의 중심 중의 중심인 곳이었다.

맘만 먹으면 종로 , 신촌, 여의도, 남산 , 다 돌아다닐 수 있었고, 내가 중학교 들어갈 렵에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는 통에 갈 수 있는 곳은 강 건너 까지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동네 친구들 무리 중에 모르는 이가 동네를 서성거렸다. 이사를 왔나 보다. 우리 또래보다 등치도 크고 훨씬 성숙해 이는 아이였지만, 학교는 다르고 학년은 우리와 같았다.

나이만큼 이해심도 많은 친구라 서서히 동네 친구들 사이에 무리 없이 끼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가 되었다.


미자는 위로는 오빠 언니가 다들 나이가 은 늦둥이 딸로 그때도 부모님들은 적지 은 나이셨다.

한눈에 봐도 사람 좋게 생기신 두 분은 당신들의 딸에게 구가 생긴 것에 대해 고마워하셨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두 분이 다 을 하셔서 우리는 미자네 집에서 자주 놀곤 했었다.

미자 어머니는 전라도 분이시라 그러신 지,  미자네 음식은 정말이지 전부 다 맛있었다.

놀다가 시장기가 느껴지면 미자는 우리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엄마의 맛있는 김치도 꼭 곁들여 주었다. 마치 정 많은 언니 같았다.


같은 동네라서 그런지 우린  중학교는 같은 교로 배정받았다.

중학교 시절 미자는  중앙여중 바로 담 옆으로 이사를 갔다.

학교는 같았지만 이 서로 려 학교에서  마주치는 일 고는 각자의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었다.

그러나, 구의 끈은 계속 이어져 내가 속상한 일이 있거나 하면,  미자는 꼭 밥 한 끼를 차려 맛있는 엄마표 김치와 함께 내 앞에 내어 놓았다.


고등학교를  미자는 우리와 달리 여상을 가는 바람에 각자의 생활은 달라졌지만, 내가 사귄 새로운 친구들과 항상 같이 놀고 , 나는 미자가 사귄 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 당시 심 노란 딱지, 모카골드가 새로 나온 커피가 유행이었다.  지금처럼 커피가 그렇게 흔하지 않은 시대였다.



추운 겨울날 내 마음이 힘들어질 때면,  아무 때나 미자네 집에 들러 라면 한 그릇 먹고 난 후,  미자가 타 주는 커피는 지금 생각해도 그리울 정도로 맛있었다.  따뜻한 아랫목과 커피 한 잔을 내어주던 내 친구의 무심한듯한 따뜻한 배려 덕에, 나는 내 마음의 상심을 여지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런 나를 미자는 항상 내 편에 서서 위로해 주었다.

자기 선에서 조금은 버거웠을 내가 미자는 언니처럼 묵묵히 받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에 미자와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미자가 많이 참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착한 애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자는 손끝이 야무 쳐서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했다. 엄마의 손끝을 닮아서 그런지 살림이나 음식도 곧 잘했던 미자는 만지는 거, 화장하는 거 등등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했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 후, 이것저것 일을 하다 돈을 모아 메이컵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 압구정동의 유명한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내 기억으로는 영화판에 보조 메이컵 아티스트로 여기저기 다닌 걸로 다.

그러나 , 내가 러시아로 떠난 이후 미자와는 연락이 잘  됐고, 그 당시 3살 연하의 애인과 사귀다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자의 결혼식까지 참석했던 기억이 있다.

서로 다른 삶으로 인해 만날 수 있는 횟수가 줄어들자 서서히 관심 밖으로도 밀려나게 되었다.


간간히 알려진 소식으로는 집안의 남인 시댁에서 아이를 원했지만,  간절히 원하는 만큼 미자에게는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때 미자가 했던 말이 자신만 애가 안 생기는 줄 알고 불임 전문 병원으로 유명한 차병원을 다녔는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단다.

미자는 애가 생기지 않는 거에 불안해했다. 가뜩이나 나이도 많아 시댁에선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 이후에 연락이 끊겨 미자는 내 결혼식에도 올 수가 없었다.


그 옛날 최신식 오디오 세트를 가지고 싶어 했던 미자. 그때 난 내가 성공하면 꼭 너에게 그 오디오 세트를 선물해 주겠노라고 말했었다. 그 오디오 사 줄 수 있을 만큼 나는 성공했었다. 그런데 정작 그때는 내 인생의 황금기라 친구들을 만날 시간조차 없었다. 너무 바빴다. 밤낮으로 나의 인생을 위해 거침없이 나가던 순간이었다. 그 거침없는 순간이 지나고 나니 내 그리운 친구들을 내가 잊고 있었다.

한가한 시간이 주어질 때 친구들이 내 옆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자신들의 삶과 열하게 그들도 나름대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미자의 소식이 궁금해질 때쯤 생도  조용하게 흐르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또다시 외국으로 나가 살아야 하는 나의 역마살은 친구들을 찾을 겨를도 없이 또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어느 한 날 어렵게 연락이 되어 정릉 어디 쪽에 분가해 나가서 았던 미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나를 여전히 그 옛날 그때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 주었고, 결혼 전부터 안면이 있던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우리를 대학로에 나가서 저녁과 술을 사 주었다.  그 날이 미자를 만난 마지막 날이었다. 그 뒤로 계속 연락이 되다가 아마도 서로의 연락처를 잃어버린 거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 찾는 거는 일도 아니라는데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그때 대한민국에서 미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이렇게 찾기 힘들고 니 미자가 살짝 원망스러웠다.

내 이름은 쉽지 않은 이름이라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도 않을 텐데....


중앙여중을 나오고 88년에 신정여상을 졸업한 내 친구 미자,

결혼 당시만 해도 친정이 연세대 건너편 연남동에 살았고, 결혼 후 시댁인 안양에서 살다가 정릉 쪽으로 분가해 살았다.

자의 고등학교 구가 정릉동에 있는 숭덕초등학교 근처에서 태권 도장을 하는 거 까지 알고 있다.

혹시 누가 내 친구 미자를 알고 있다면 북아현동 친구가 찾고 있다고 알려줬으면 좋겠다.

지금은 오디오 세트가 필요 없을 테지만 그 보다 더 좋은 선물을 해 줄 수 있다고 내 마음과 함께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

자야!!!

그때의 따뜻한 아랫목과 달달한 커피는 내 음을 따뜻하게 녹여준  잊지 못할 추억이었어... 보고 싶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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