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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Aug 11. 2022

가장 작은 세상으로부터의 위로

초록 물결의 위로

상처를 입다.


계속되는 지겨운 팬데믹으로 나의 일상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년을 꼼짝없이 밖이 아닌 안에서의 지루한 일상이 시작되고, 사람 간의 만남에서도 외출이 아닌  가벼운 만남으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가 되었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개월 전에 중학생이 된 막내의 친구들은 장난기 많은 아이에서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쑥 커버린 키만 자란 작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느덧 쑥 커버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니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의 소중한 대를 앗아간 팬데믹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거대한 사회적인 현상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이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물 흐르듯이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그 독한 역사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들의 인생을 헤쳐 나왔듯이 말이다.



조심스럽게 필요한 경우 닌 이상은 외출이라는 바깥출입을 줄여 나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경우엔 긴 팬데믹 기간 동안에도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간의 만남을 두려워하며 가슴 졸이면서도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을까?


사람 간의 만남이 줄어들면 사람으로부터 생기는 스트레스가 작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팬데믹이라는 그 어마 무시한 두려움 속에 미국에서는 연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현실이 되어있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의 일원이었을 듯한  쓰레기 더미처럼 던져지는 하얀 시체  꾸러미는 인간의 격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소중한 가족의 죽음 앞에 누구 하나 억울하다고 나설 수 없는 기이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극도의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이런 공포감 속에서도  사람의 탐욕은 줄어들지 않는가 보다.


죽음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 아니라 먹잇감 앞에서 더욱 처절해지는 맹수의 마지막 잔인함을 보듯, 오히려  팬데믹이라는 특수환 상황에서 잡초보다도 더 왕성한 자신의 탐욕을 비밀스럽게 키워 나간 이들도 있었다.


탐욕을 가지면 안 되는 인간의 옷을 입은 자들의 시커먼 탐욕은 바글바글 되던 인간들의 숨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망설임조차 없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 탐욕은 더럽고 뻔뻔스럽기까지 하여 인간의 눈을 더럽히고, 타인의  마음속에  지우기 힘든 추한 기억으로 거대한 생채기를 내기에 이르렀다.


탐욕을 가져서는 안 되는 세상에서의 신성한  옷을 입은 대가로 어마 어마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누리며, 그 권력을 어느 누구도 누르려하지 않는다는 안전한 믿음을 방패 삼아, 겉으로 보이는 신성한 권력을 누리는 자의 뻔뻔한 탐욕은,  유다의 더러운 욕망을 가진 자와 합체되어  보기 힘들 정도의 탐욕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눈앞에서 벌어지는 탐욕을 보고도 보았다고도 할 수 없는 더러워진 눈을 감아야만 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진실에는 눈 감고,  스스로를 적당한 위선자로 치부하며 더러운  세상과 타협했다. 그 작고 힘없는 권력도 두려워 그 권력의 칼날이 자신의 그 어디에도 닿지 않게 안간힘을 쓰며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들의 안위가 그 더러운 진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겠지.... 당연하다. 나 또한 그 치사하고 졸렬한 인간 중 하나이기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열한 인간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나의 세상 안에서도 세상은 뻔뻔하지만, 드러난 세상 역시나 뻔뻔한 세상이다. 얼마큼 뻔뻔해야 이 세상을 맨 정신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일까? 얼마나 비정상적이어야 나의 아이들에게 파렴치한 세상을 알려 줄 수 있을까?


더러운 생각과 올바른 생각이 나의 머리를 지배할 때면,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머리는 고통으로 흔들리고 만다. 마치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 흔들거리는 머리로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그 어느 때처럼 자유스럽고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해 그저 침묵만이 답이라서 그들 역시 침묵으로 조용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겠지? 조용히 나 혼자  정답 없는 답을 내려본다.


그러나 방관자가 많아지는 세상은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이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세상이 아니란 걸 그들과 나는 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 방관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한 고통이 나의 아이에게 닥칠 거라는 것도 기에 그 누구도 방관자를 욕하지 않는다.


당당함을 가르쳐야 할 어른들에게 가장 약점인 자식을 위해 부메랑이 되어 입을 다물게 만드는 세상...

과연 옳은 세상일까?

오늘도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또다시 입을 다문다.

더 이상 입바른 소리가 먹히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숲에서 위로받다.


인간 세상에서 묻혀온 상처를 인간으로부터 치유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믿었던 주변인들에게 조차 치유받을 수 없는 상처는 처음보다 훨씬 더 아프게 곪아 있었다.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젠 안으로의 상처가 밖으로 드러내 놓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겁하게 숨어들었다. 숨만 쉬는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치유라는 단어가 버거울 정도로 그저 가만히 숨만 쉬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할 수 있는 건 집 주변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도는 것뿐이었다.


서서히 초록물결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록빛이 사람에게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은 알고는 있었지만, 상처가 정점을 다다를 땐 그 어떤 이유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니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 년을 아팠다. 지금도 역시나 아프다. 집 주변을 서서히 돌아본다. 봄이 지나면 다음 봄을 기다리게 할 정도로 설레던 소박한 나의 집이다. 사방이 온갖 초록의 나무들로 둘러 쌓여 계절마다 서로 다른 사진을 연출해 내는 자연을 품고, 계절의 변화가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날 정도였던 나의 주변을  일 년 동안 돌아보지 못했다.

나의 숲을 들어가 보았다.

겉으로 보면 빼곡히 나무로 둘러 쌓여 있던 숲 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듬성듬성 비어 보이는 초라한 중년의 텅 빈 머릿속처럼 작은 길들이 나있었다. 마치 나에게 조금씩 자기의 품으로 걸어 들어오라는 암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숲 속의 길이었다.


나만의 작은 둘레길이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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