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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Sep 01. 2020

사춘기 소녀, 상사병에 걸리다.

전설의 먹심 분식점 디제이 , 먹돌이 쟁탈전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상사병으로 시작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서, 약 1시간 정도 자유 시간이 주어지고 나면, 곧바로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이 강제로 이루어진 시대였다. 그야말로 새벽별을 보고 집을 나가면  야밤의 달을 보고 집에 들어가는 생활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선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학교생활이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우린 꽤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났음을 알림과 동시에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뛰기 시작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뒤로 호박씨 잘 까는 진선이 또한 이 대열에 합류한다. 이상하다 제가 저렇게 필사적으로 뛸 아이가 아닌데...

그 무렵 진선이는 자신의 동네에 있는 대학이 목표였다. 너는 어디 대학 갈 거냐고 물어보면

"어.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대학 갈 거야"

우린 다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선이가 살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신림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너는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오냐"  직설적인 화법의 대가였던 나는 항상 진선이를 놀렸다.

진선이는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촌스러운 네모난  양철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을 마지막까지 꾸역꾸역 잘도 먹었다.

자신의 과외를 해 주고 있는 자기 동네 학교를 다니고 있는 오빠랑 결혼할 거란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마시지 말라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아이였다.

그 오빠 이름이 오희용이었는데, 우린 만날 희용이 마누라라고 진선이를 놀렸다.  난 참 30년이 지난 지금도 왜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는지...

진선이는 자기 동네서 엄청 떨어진 상명여대를 들어갔다.  그것도 차 한 번으로는 갈 수 없는 곳 세검정으로... 그나마 돈 있는 집 딸이라서 자기 동네 대학교 오빠의 과외 덕분에 재수는 안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진선이가 이 시간에 저렇게 먼지 날리도록 뛰는 이유가 뭘까?

그 당시에는 학교 앞, 분식점들이 학생들을 끌기 위해서 분식점 안에 뮤직박스가 있었다.

주로 여학생이었던 손님들이 , 그 당시 유행하던 신청곡을 쪽지에 적어 넣어주면, 그걸 받아 옛날 피판을 올려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가 있었다. 어떤 디제이냐 따라서 분식점의 매상이 좌우되던 시절이었다.

추억 돋는 아날로그 시절이었다.

그 디제이가 조금이라도 잘 생기면 난리가 나는 것이었다.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그 디제이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가 있는 그 줄에 나란히  한성 남자 중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중간에 이 분식점이 위치하고 있었다. 부리나케 뛰어야 밥을 먹고 음악 듣고, 늦지 않게 들어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디제이가 새로 왔단다.. 먹심의 새로운 디제이

생긴 게 완전 내 이상형이었다. 그 당시 청소년 축구로 날리던  김주성과 강석우를 합쳐 놓은 듯한 귀엽게 생긴 막내 디제이였다.

우리의 낙이 생긴 것이다. 먹심에 유명한 분식점의 꽃 , 쫄면을 시켜 놓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신청곡을 작성해서 디제이 박스에 밀어 놓는다.

서로 눈도장 찍기에 바쁘다. 알고 보니 진선이도 이 디제이 오빠를 찍은 것이었다.

먹심의 먹돌이 쟁탈전이 시작된 것이다.

여느 여고생이 다 그렇듯이 좋아는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은 못 하고, 속으로만 속앓이 하던 수줍은 여학생들이었다. 진선이와 나는 묘한 경쟁의 관계가 됐지만, 그 일로 친구 사이가 갈라지지는 않았다. 둘 다 워낙 괴짜라서... 나중에 진선이는 포기하고 나만 열심히 먹심을 들락날락거렸다.

내가 거기서 먹은 쫄면 값만 해도.....


거의 출근 도장을 찍던 나에게 어느 날 어여쁜 언니가 그 남자 옆에 있다. 아!!! 상대방은 모르는 이 질투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웃기는 시추에이션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언니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는 점점 말라가기 시작하고 , 공부는 커녕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나의 속앓이는 계속되고,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나의 좌우 전방 친구들은 약속 장소는 무조건 먹심으로 잡았다. 다른 곳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좌우 전방에 진선이도 합류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 것이었다.


오죽하면 명동성당에서 만났던 남사친 뒷돌이가 하두 기가 서, 길 가다가 먹심만  나오면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던져주면서, 먹돌이 만나러 가라고 쫄면 값을 줬다. 곱게도 안 줬다. 꼭 던져줬다.


나는 점점 말라갔다. 자고 일어나면 생각나고, 나의 일상을 한 남자가 다 망가트려놨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호르몬의 장난이었지 싶을 만큼 나의 감정은 집요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집착이 더 컸지 싶었다.


이런 감정의 널뛰기를 상대방이 모를 리 없었다. 내가 하루라도 걸러 먹심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다음 날 내가 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좋아하는 곡을 틀어주었다. 그럼 또 우리는 오만가지 상상을 다했다. 분명히 그도 나를 좋아할거라는둥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순간은 풍선처럼 심장이 마구 마구 부풀어 오르고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어여쁜 언니가 더 이상 먹돌이 옆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호라!!!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더욱더 열심히 먹심을 드나들었다. 결과는.......

역시 옛날 선조들의 말은 틀리지가 않았다.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만 , 100번을 찍었는데 안 넘어 올리가 없지. 드디어 먹돌이 쟁탈전의 최후 승자는 내가 되었다.


같은 동네 살았기에 종종 보기도 했지만 , 그래 봤자 기껏해야 먹심이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 것이 아닌 가지지 못했을 때는,  그렇게 잘 생겨 보이고 미치겠는 감정이 이상하게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 심장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한 건 불과 얼마 안 가서였다, 지금 까지의 쫄면 값이 무색하게.....

1986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어쨌든 공식적인 남자 친구라 초콜릿은 주어야 하니 , 초콜릿 두 개를 사서 포장을 했다. 하나는 쫄면 사 먹으라고 나의 애정전선에 도움 값을 준 뒷돌이 꺼....

그 당시는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하는 날이 밸런타인 데이였고, 그 품앗이로 3월 14일은 화이트 데이라고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이었다. 화이트 데이날 줄게 있다고 해서 나갔더니만, 이것이 나의 상사병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줄이야 ㅎㅎㅎ


만나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쇼핑백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뭔 사탕을 저리도 많이 담았나 싶었다.

헤어지기 직전에 집에 가서 풀어보라며 그 큰 쇼핑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심 궁금했지만 그 흔한 사탕이려니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궁금증을 풀어보니 하하하........

그 당시 천마리 학을 접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내주는 그런 유행이 있었다. 아마도 전영록의 종이학이라는 노래의 여파이기도 했지만 , 그 유행은 그 이후로도 꽤나 오래갔다. 나도  중 하나였는데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지금 기억이 안 난다.

그 속에 학 대신에 껌종이로 접힌 옷들이 있었다. 껌종이로 옷을 천 개를 접어 사탕과 함께 그 큰 유리병에 들어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이 옷을 접기 위해서 앉아서 청승맞게 접고 있는 걸 상상하니,  정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본 나이차 많은 무서운 울 오빠

"아주 쇼를 하고 자빠졌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때  나이차 많은 울 오빠는 성격이 동해 겨울바다처럼 차갑고 무서워서,  집안의 막내인  나라면 무조건 오케이 하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천방지축인 성격을 누르기 위해 군기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망치 같은 걸 들고 나오더니 그 유리병을 가지고 나갔다.

 따라 나가 보니, 쓰레기통 앞에서 무참스럽게 여기저기 튀는 유리조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빠는 나보고 들으란 듯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돌아다니면서 이런 그지 같은 거나 받아오고 있네"  

입으로는 욕을 하고 , 손으로는 가열차 유리병을 부수고 있었다.  오빠의 입과 손이 바빴다. 오빠의 얼굴을 보니 정말 화가 많이 난 거 같아서 나는 말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빠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 날 그렇게 그 깨어진 유리병 조각들이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때, 나의 한여름의 꿈 같았던 상사병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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