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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Aug 29. 2020

그녀는 예뻤다

절세미인 내 친구 미진이를 아시나요?

고등학교 1학년 첫날 , 나는 1학년 8반에 배정받았다.

지하철 2호선의 여파로 우리 동내가 아닌 저 멀리 영등포에서 까지 애들이 우리 학교로 배정받아왔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이라고 보분이와 경희 우리 셋은 , 같은 학교라서 마치 주인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했다. 중앙 여중과 여고가 같은 재단이라 같은 교정을 썼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보분이와 경희는 아래층 1학년 1반과 2반이 되었고, 나는 2층 코너에 8번으로 배정받았다.

아쉬웠지만 적응할 수밖에....

이쁜 애가 나타났다

첫날,  눈에 띄게 이쁜 애가 우리 반에 들어왔다. 앵두 같은 입술에 왕방울 만한 쌍꺼풀 진 눈에 백옥 같은 얼굴을 한,  그야말로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아이였다. 지금으로 치면 이영애와 이상아를 섞어 놓은 듯한 얼굴이었는데, 사실 이상아에 좀 더 가까운 얼굴이었다. 거기다 우리에겐 없었던  풍만한 가슴까지...

신은 정말 우리에겐 한 가지도 겨우 주거나, 그나마 그 하나도 안 주면서 왜 한 사람한테 몰빵을 하냐.. 열 받아서 속으로 질투 작렬하고 있는데... 신은 존재했다.

이 친구가 입을 여는 순간 거칠고 쉰듯한 그녀의 허스키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뭐라도 하나 건져 올린 듯한 안도의 한숨을 들키지 않게 살짝 쉬었다. 아마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듯싶었다.

거친듯한 허스키 목소리가 생긴 거와는 달리 엄청 터프하게 들렸다. 전혀 다른 목소리에 아이들은 저마다 놀랐고 , 감정이 없는 차가운 성격은 그 목소리에 더해져 사실은 조금 뜨끔 할 정도였다.

친구가 되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로 자리 배정을 받고 나면, 그 주위에 그만한 그만한 애들이 1년 내내 같이 움직이는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반에서 괴짜들은 다 우리 그룹에 끼여서 8명이 매일 도시락을 펴 놓고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다. 이 사이는 고등학교 졸업이 돼서도 이루어졌으나 , 각자의 길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대학을 들어가서부터는, 다들 갈라져 끝까지 가지 못한 친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8반에서 알아주는 괴짜들이었고, 그 덕에 우리 반은 항상 웃음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 그룹 안에서 미진이는 정화라는 똘끼 충만한 아이와 주로 같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컸던 소한이는 뒷자리에서 우리 자리로 원정 와서 까지 놀다가 우리 팀이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 교실은 여학생 교실이라는 게 무색하리 만치 시끄러웠고 왁자지껄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청춘은 그 자체로도 싱그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미진이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다툼으로 일어났다.

그 당시 아이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엉덩이 무거운 애들과 나처럼 엉덩이가 가벼워 한 자리에 눌러앉아 있지 못하는 애들...

엉덩이 무거운 애들이 성적도 좋으면 다행이지만 , 세상은 그렇게 딱딱 자로 잰듯하게 결과가 나와 주지 않는 시대였다.

나는 초치기의 달인이라 쪽지시험이 있는 시간이 되면, 쉬는 시간 10분을 초집중해서 공부를 하는 반면, 엉덩이 무거운 애들은 집에서부터 온통 시험공부에 열을 올린다.  미진이가 그런 애였다.

미진이는 경쟁심도 대단해서 지는 것도 엄청 싫어했다. 나는 공부에 대해선 그다지 생각이 없어서 노는 거에 더 치중하던 시기였다.

불어 시간 쪽지시험이 시작되었다.

10분 투자한 결과는 100점.

그러나 미진이는 자기가 투자한 시간에 비해서 점수가 시원찮아 보였다.

갑자기 나에게 와서 시비를 건다.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하고는 안 놀 거야!!!"

사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학 쪽으로 촉이 좋아서 영어와 언어에 관한 과목은 절대적인 점수를 받고 있었다. 좀 재수 없지만, 불어 선생과 영어 선생이 나를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반면 수학은 연필을 굴려도 최저의 점수가 나오는 실력.

그런데 내 성격도 만만치가 않아서 단 한마디로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놀지마 그럼!!!"

그 이후 난 미진이랑 눈도 안 마주쳤다.

초조해진 미진이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눈도 안 마주쳤다.

결국, 미진이가 장문의 편지를 서서 나에게 사과의 편지를 내밀었다.

한 번은 봐주지만, 두 번은 안 봐준다 하고 친구의 화해를 받았다.

그 이후 미진이는 그런 생각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소한이와 함께...

그렇게 친해지고 나서, 우리가 미진이의 가슴 아픈 비밀을 알게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미진이의 비밀

우리 학교는 1학년이 되면,  생활관 실습이라고 해서 여자들이 지켜야 하는 덕목으로, 3일간 합숙을 하면서 다도나 예의범절 같은 걸 가르쳤다. 내가 죽기보다 싫어하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여자의 정숙함을 배우는 과정에서 입는 한복은 정말 제일 괴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3일간의 합숙을 마치면 각자의 엄마들이 방문해서 학생들이 엄마에게 한복을 입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큰 절을 올리는 과정이 있었다. 그 날 부모님들이 오셨는데, 미진이와는 전혀 닮지 않은  한 어머니가 미진이를 찾았다 자기 딸이라고...

이상하다. 어린 눈에도 미진이하고는 너무나 다른 이목구비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내심 한 군데라도 닮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들을 향한 절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유독 슬프게 두 사람을 부여잡고 있던 모녀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3일 내내 엄마를 못 봐서 울었던 것이었겠지만, 미진이 모녀의 슬픔은 그 이상인 것 같았다. 특히 차가운 미진이에 비하면 어머니는 너무도 감정적으로 우셨다.

궁금해 미치겠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어머니의 슬픔
 

2학년이 되어서 우리는 반이 다 갈라지게 되었고, 미진이는 이과로 가게 되고, 나는 문과로 가게 되어 다른 반이 되었다.

가끔 우리 반에 나타나는 미진이를 보고, 우리 반의 중학교부터 시에프 모델을 하던 아이가 미진이를 보며, 우리 학교에서 제일 이쁜 애 같다고 하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그렇게 미진이는 이뻤다. 방학이 되고 나서도 우린 계속 만났고, 어느 날 미진이가 자기 집을 초대했을 때 , 사방이 고요한 밤에 갑자기 자기 얘기를 한다. 엄마가 새엄마라고..... 그 집엔 다리가 좀 불편한 밑에 동생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의 노트에 쓰인 성이 다른 이름을 보고 소한이와 나는 짐작을 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소한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에, 우리에게 그건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친구 사이에 방해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미진이의 입장에서는 엄청 힘들게 꺼낸 이야기 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행한 가정사를 이야기했지만, 미진이는 우리들 중에 가장 부자 부모를 가졌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누리고 있었다. 거기다 미진이 엄마는 너무나 좋으신 엄마였다.


너무 가슴 아팠던 일은 어머니가  우리가 집에 놀러 가는 날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눈길을 안 주었다. 다른 자식들에게 행여나 상처가 될까 봐 그랬는지.. 난 나의 친구인 미진이도 애처로웠지만, 정환이가 더 애처로웠다.

내 오지랖은 미진이는 둘째 치고, 미진이네 집에 가면 정환이 방에 가서 꼭 안부를 묻곤 했다. 너무나 착했던 아이, 그 외로움을  견디고 나중에 의대에 합격해 , 아마도 지금쯤  훌륭한 의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각자의 애를 데리고 재혼하는 가정이 그다지 흔하지 않았기에 난 그들의 갈등을  알 수가 없었다.

물질적으로 다 가졌지만, 정신적으로 단단하지 못했던 미진이는 졸업을 한 이후에도 마음을 잡지 못했다.

학창 시절의 그 날 선 경쟁심이 어디 갔나 싶게,  미진이는 대학입시를 포기하고 유학을 간다고 영어 학원을 등록했다. 그런데 무얼 해도 미진이에게는 절박함이 없었다. 영어학원도 부모가 시키니깐 하는 거고, 뭐든 자신의 의지가 없이 먼 산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쁜 남자

그러다가 정화가 소개해준 대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참.... 나쁜 남자가 그렇게 좋았을까?

나 같으면 트럭으로 줘도 안 받았을 그런 남자에게 미진이가 완전 푹 빠져버렸다. 인생은 이쁘면 다 공주 대접받을 것 같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항상 퍼다 주는 건 미진이었고, 남자는 넙죽넙죽 영양가 있는 것만 받아먹던 남자였다. 나는 미진이가 그 남자랑 있는 게 너무 싫었다.

" 내 눈에는 보이는데 왜 니 눈에는 안 보이는 거니."

우린 답답했지만, 알고 보니 이 남자가 정화랑 소한이에게도 집적거린 아주 나쁜 놈이었다.

왜 나는?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난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여자가 아닌가 보다. 내가 그 당시 좀 싹수가 없긴 없었다.

미진이의 끝없는 한쪽 사랑은 지쳐갔고, 그들은 헤어졌다. 그 이후 미진이는 망가져갔다.


그녀의 방황에 미진이 친남동생 제군이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와 제군이는 미진이를 찾아 헤매야 했다.

그녀를 찾고 나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싶었지만. 미진이의 초점 없는 눈빛에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없이 제군이에게 미진이를 데려다주는 수밖에.... 우리의 청춘은 이렇게 아팠다.

그녀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그 이쁜 얼굴에 가득 담은 슬픔이 그 날따라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친구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 그저 묵묵히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날 이후 그 일에 대해서 절대 묻지도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친구의 슬픔을 알았기에.....

시간이 흘러 우리 집에 놀러 오겠다는 미진이를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보고 해맑게 웃던 아이..

 내리자마자 충격적인 소리를 한다.

나 시집간다... 집에서 벌써 혼수 준비 다 해놨단다...

남의 얘기하는 줄 알았다. 자기 결혼에 관심도 없는 아이... 이 친구를 어쩌면 좋을까?

남이 보기에 번듯한 신랑감이었다. 결혼하기 전 미진이의 신랑은 당당함이 넘쳐 다소 오만해 보였다.

결혼식을 전후해서 항상 같이 있던 우리가 그녀의 결혼식이 끝나고, 시댁으로 들어가 살면서 그 이후엔 종종 볼 수밖에 없었다.

나름 결혼 생활을 잘 이어가는 것 같아 안심이 되긴 했었다. 나의 친정 오빠 결혼식에 아이를 안고 온 미진이는 그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남편의 사업이 힘들어지자 역곡의 어느 허름한 빌라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이들의 옷을 사들고 찾아갔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에는 내 삶을 살아가기 바빴기에, 미진이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로부터 한 참 뒤, 소한이의 결혼식에서 여고동창들이 모인 자리에 미진이도 만날 수가 있었다.

밝아 보이고 가정에 충실해 보이는 어여쁜 엄마로 살고 있었다. 내심 나는 안심했다.

그 이후 간간히 전화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 이후에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소한이가 애를 낳고 , 소한이의 집들이에서 본 미진이는 아가씨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상큼했고, 그날도 내 기억에는 참 밝아 보였다. 그것이 미진이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이후 간간히 전화통화를 하긴 했지만 , 그 이후에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미진아 어딨니?

어느 날 소한이게서 미진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 있지 않아서 주로 소한이하고는 연락이 주로 됐다는데,  마지막으로 이혼을 한다고 하고 연락이 끊겼단다.

이혼을 했다고 연락을 끊을 아이는 아닌데......

계속 나는 미진이의 소식이 궁금해,  한국에 들어오면 친구들에게 그녀의 소식부터 먼저 물어봤다.

미진이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정화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정화도 어느 날 소식이 딱 끊어져서 더 이상 미진이 소식을 듣지 못했단다.


남자 친구와 길거리에서 손금을 보았다는 미진이...

그 손금을 봐주던 남자가 자기 손금을 보더니, 이 손금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쥐고 있는 팔자라고 했단다.

손금에 생명선이 없다고.  그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친구.....

너무너무 궁금한 내 친구... 아직도 그녀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결혼을 해서  지금쯤 큰 아들이 30살이 넘어갈 텐데

둘째 아들을 너무나 이뻐했던 친구.. 그 아들도 아마 26살이 되어 갈 텐데.

나는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 이뻐서가 아니라 내 친구라서....

 젊은 날의 그 힘들던 아픈 청춘을 같이 보냈던, 나의 친구,  그래서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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