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하게 되는

자기 결정성이론에 근거한 자율성

by 김연수

도어락 버튼이 '삑' 하고 울리면, 세 아이가 현관 앞으로 달려왔다.

하루의 끝,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엄마, 나 오늘 시험 100점 받았어요!"
"아빠! 나 오늘 질문을 세 번이나 했어요!!"


세 아이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침에 출근하는 부모와 함께 집을 나선 뒤 저녁에 처음 만나는 부모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말하는 순서를 주는 번호표라도 발행해야 할 것 같은 아수라장이었다.


(물론 지금은 어림도 없다. 역시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공부를 시켜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효율적일까 고민스러웠다.

아이들은 셋. 두 살, 세 살 터울이라서 첫째와 막내는 5살 차이다. 첫째는 이제 공부 좀 해야 하는데, 막내는 말도 잘 못하는 막무가내 애기다.


우린 거실에 TV를 없앴고, 아이들을 한 공간에 모았다. 15년 전 거실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우리가 만든 그 단단한 리듬이 아이의 자율을 키운다는 걸.



밤 9시, 하루의 마침표


낮에는 학교 수업 시간 '집중'의 힘이 중요했다면
밤에는 가정에서 '자율'의 힘이 핵심이다.


하지만 자율이 무한한 자유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 집에는 단단한 기준이 있었는데. 바로 하루의 마침표가 확실했다.

'밤 9시에는 불을 끈다'


저녁 5시 30분에 밥을 먹고, 7시쯤이 되면 자연스럽게 거실로 모였다. 그리고 9시가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 리듬 안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시도하고, 선택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다섯 식구가 같은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각자의 일을 했다. 시간과 공간이 자연스럽게 온기로 채워졌다. 아빠가 설거지를 하면 엄마는 동생 책을 읽어주고, 그 책을 안 읽고 싶은 사람은 본인이 하고 싶은 다른 활동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니다. 낮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지금은 각자의 방식으로 배움을 정리하는 시간. 우리는 이 시간을 '가족 공부 시간'이라 불렀다.


내가 우리의 시작을 알리는 한 마디로 자주 했던 말은 바로 이 문장이다.

"오늘은 뭐부터 할까?"


그 질문 하나로 밤의 공부가 시작되곤 했다. 숙제를 먼저 할지, 그림을 그릴지, 책을 읽을지는 그날의 선택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공부였다.


9시 취침이라는 구조가 있었기에, 그 안에서의 자율은 방임이 아닌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의 세 가지 조건



1. 자율성 — "오늘은 뭐부터 해볼래?"


식탁에 모이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시간의 주인은 아이였다. 첫째는 숙제부터, 둘째는 그림 그리기부터 시작했다. 막내는 언니들 사이를 오가며 때론 '이놈'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각자의 속도와 순서대로 살아갔다.


자율은 방임이 아니었다. 9시 취침이라는 안정된 리듬이 있었기에 그 안에서 마음껏 시도할 수 있었다. 시간의 틀은 아이의 자유를 위한 경계선이었다.


수학 연산 문제집을 풀다 보면 아이들이 한동안 너무 하기 싫어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충분히 기다려줬다. 특히 10세 미만 아이들은 개념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일주일쯤 수학을 쳐다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다시 해볼까?" 하며 다가갔고, 힘들어하는 부분은 함께 짚어주었다. 진도표대로가 아닌, 아이가 멈추는 곳에서 기다리고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매일 스스로 무엇을 할지 선택하며 시간을 보낸 아이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 파악하고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매사 주도적인 아이가 되었다.


학원만 많이 다닌 아이들은 하나가 끝나면 "선생님, 저 이제 뭐해요?" 이렇게 질문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섬뜩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할 일, 자기 시간의 주인으로 살아갈 때. 아이도 행복하고, 부모도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하다.




2. 유능감 — "여기까지 해냈구나"

공부는 작은 성공의 축적이어야 한다. 어제 못 풀었던 문제를 오늘 풀고, 지난주보다 책을 조금 더 읽고, 받아쓰기 점수가 오르는 순간들. 아이들은 '나도 할 수 있다'를 경험했다.


초등 저학년 때 만든 '가족 공부 시간'은 무엇을 하라고 정해준 게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 중 이해 안 되는 걸 찾아보기도 하고, 궁금한 단어를 사전에서 찾기도 했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아이도, 그냥 교과서를 다시 읽는 아이도 있었다. 엄마는 옆에서 함께 책을 읽었다. 그 시간은 '공부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가 궁금해지는 시간'이었다.


유능감에는 적절한 난이도가 중요하다. 아이들이 선택한 활동은 대부분 그날 학교에서 배운 내용의 반복이었기에 적당히 도전적이면서도 반드시 익혀야 할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기체, 액체, 고체를 배웠다면 교과서를 다시 읽고, 자연관찰 책도 찾아보고, 직접 그릇에 옮겨 담으며 성질을 이해했다. 관련 영상도 찾아봤다. 아이의 호기심이 무한히 확장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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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계성 —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첫째가 수학을 풀면 둘째는 그림을 그리고, 막내와 나는 책을 읽었다. 소음에 익숙한 아이들은 웬만해선 동생이 소음을 내도 시끄럽다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일을 하면서도 시선이 닿고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누나, 이 문제 어떻게 풀어?"

"엄마, 다 했어요. 봐주세요."

언제든 스스럼없이 질문했고, 대부분 스스로 답을 찾았다.

초등 수학이 어려워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리기도 했다.


부모가 '감시자'가 아니라 '동행자'로 함께했기에 아이들의 감정이 편안했다. 감정이 좋아야 루틴이 지속되고, 루틴이 지속돼야 실력이 쌓인다.


다섯 식구가 거실과 부엌에 복닥거리는 저녁 시간. 학원에 가지 않으면 뒤처질까 하는 불안조차 잊을 만큼, 부모인 내 마음도 아이들 마음도 편안했던 그 시절의 풍경이다.





그땐 그저 평범한 밤이라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니, 우리 거실에는 교육학이 말하는 모든 조건이 있었다.

교육학에서는 자기 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을 '아이의 내재적 학습 동기를 키우는 환경 설계 원리'로 본다. 아이의 성격을 바꾸는 게 아니라, 환경을 설계해 주는 일이 핵심이다. 세 가지 조건이 그 기초가 된다.


첫째, 자율성(Autonomy) —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는 경험.

둘째, 유능감(Competence) —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

셋째, 관계성(Relatedness) — 함께 있다는 안정감.

정사각형 썸네일..jpg 자기 결정성이론


이 세 가지가 충족될 때, 아이의 동기는 외부의 통제가 아닌 내면의 의지에서 자란다.


거창한 교육철학이 아니라 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생존 전략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교육학적인 환경이 되어 있었다.



초등 시절, 공부의 재미를 배우는 시간


아이들은 학년이 오를수록 하기 싫은 일도 하고, 목표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초등 저학년 시절은 다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글을 읽고, 숫자를 세고, '공부는, 몰랐던 걸 알아가는 과정은 재미있다'는 감각을 알아가는 시기다.


그때 필요한 건 불안이 아닌 호기심, 비교가 아닌 반복, 경쟁이 아닌 관계였다.


거실공부는 그 모든 요소를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선택하는 법을 배우고, 작은 성취를 쌓으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 경험이 쌓이면서, 공부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로 바뀌어갔다.




거실에서 자란 자율성


매일 밤 거실에서 자율성이 자라고, 작은 성취가 유능감을 쌓고, 가족의 존재가 관계를 채웠다.

그 반복이 결국, 아이의 학습 동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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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취침이라는 하루의 리듬은 그 모든 배움의 틀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안정 속에서 자유를, 질서 안에서 성장을 배웠다.


가정은 교실보다 작지만, 그 안에서 자란 배움의 힘은 학교를 넘어 삶 전체로 뻗어나간다.


거실의 조명 아래에서 아이들이 배운 건 단지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가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하고,

작은 성공을 쌓으며,

함께 있는 것의 힘을 배우는 일.


그것이 우리 거실공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었다.


오늘의 교훈 :
환경이 아이의 성장 수익률을 결정한다.
매일 밤 두 시간, 선택과 성취와 관계가 복리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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