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가루 뭍은 추억
늦은 밤, 뉴올리언스 (New Oreleans)의 카페 뒤 몽드(Café du Monde)는 여전히 북적였다. 재즈 선율이 습한 공기에 스며들고, 치커리 커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이 시간에 누가 또 도넛을 먹을까?' 싶은데, 답은 간단하다. 나를 포함해 줄을 서 있는 모두 다. 테이블마다 하얀 파우더 슈가가 폭설처럼 쌓여 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이 사람들을 부른다.
한입 베어 문 베네(Beignet)는 바삭하다 못해 가벼워서, 그 많던 파우더 슈가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어디로 갔나 싶다. 바삭한 겉과 부드러운 속, 달콤한 여운은 낯선 여행자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뉴올리언스의 인사 같았다.
설탕 같지만 더 곱게 갈린 파우더 슈가는 베네의 공기놀이 같은 가벼움을 더하며, 한 입마다 재즈의 리듬처럼 부드럽게 퍼진다.
뉴올리언스 사람들에게 베네는 간식 이상이다. 18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 정착민들이 가져온 '사각형 튀김빵'이 현지의 치커리 커피 문화와 만나며 지금의 베네가 됐다.
이 빵을 먹는 건 뉴올리언스 역사를 한입 맛보는 셈이다. 카페 뒤 몽드의 탁자에 둘러앉아 베네를 나누는 사람들, 낯선 이들과의 짧은 대화는 이곳의 공기를 더 따뜻하게 만든다.
요즘은 뉴올리언스를 떠나 미국 곳곳의 레스토랑 디저트 메뉴에서도 베네를 만날 수 있지만, 재즈와 파우더 슈가가 어우러진 카페 뒤 몽드의 그 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한국 여행길에서도 비슷한 순간을 만났다. 시장 골목 모퉁이,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빵집. 기름 튀기는 소리와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그곳에서, 갓 튀겨낸 꽈배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뜨거우니 조심해요"라며 종이봉지를 건네주신 아주머니의 손끝엔 기름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는 조심은커녕 길을 걸으며 바로 한입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 속은 쫄깃. 설탕 알갱이가 혀끝에서 녹으며, 문득 어린 시절 학교 끝나고 엄마가 사줬던 꽈배기 맛이 떠올랐다.
베네의 파우더 슈가가 공기처럼 가볍게 녹아든다면, 꽈배기의 설탕은 알갱이 하나하나가 씹히는 소박한 달콤함으로 다가온다. 같은 설탕인데, 어딘가 다르다.
꽈배기는 중국 북부 지방의 전통 과자 마화(麻花)에서 유래했다. 조선 말기, 산둥 지방 화교들을 통해 전해졌으며, 광해군 시절 기록된 '마화병'이 꽈배기와 거의 동일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 반죽을 꼬아 기름에 튀겨내며 '꽈배기'라는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특히 70~80년대 분식집 전성기 시절, 꽈배기는 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군것질하던 대표 메뉴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도 세련된 포장으로 꽈배기를 만날 수 있지만, 시장 골목에서 아주머니의 따뜻한 인사와 함께 건네받는 종이봉지 속 꽈배기가 여전히 가장 정겹다.
베네와 꽈배기는 유래는 다르지만 닮았다. 튀긴 반죽에 설탕을 뿌린 단순한 레시피인데,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베네는 곱디고운 파우더 슈가로 뉴올리언스의 화려한 재즈 공기를 품고, 꽈배기는 투박한 설탕 알갱이로 시장 골목의 소박한 정을 담는다. 둘 다 그 순간의 장소, 사람, 추억을 입안에서 녹여낸다.
카페 뒤 몽드에서 베네를 먹던 밤, 색소폰 멜로디가 공기 속에 녹아들었다. 파우더 슈가가 셔츠에 눈처럼 쌓였지만, 그 바삭한 한 입은 낯선 도시에서 처음 느낀 위로 같았다.
한국 시장 골목에서도 비슷했다. 갓 튀긴 꽈배기 봉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한 입 베어 물면 설탕 알갱이가 톡톡 터지며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혼자 먹어도 좋지만, 누군가와 나누면 더 달콤하다. 다만, 다음엔 설탕 가루 좀 덜 묻히고 싶다.
베네와 꽈배기. 몸엔 조금 미안할지 모르지만, 그 짧은 달콤함이 하루를 웃게 만든다면, 인생엔 오히려 플러스다. 그러니 매일은 아니어도, 가끔은 튀김의 행복을 허락해도 괜찮다.
파우더 슈가와 설탕 알갱이가 전하는 그 달콤함은, 뉴올리언스의 재즈나 한국 시장의 따뜻한 불빛처럼, 어디서든 우리를 잠깐이라도 미소 짓게 한다.
베네 믹스를 사서 만들어봤지만, 그 맛은 그 근처에도 못 갔다. 결국 음식은 맛만이 아니라, 분위기까지 함께 먹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