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부터 유쾌한 나라, 미국
남편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학교에서 "John Baker"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시 웃음을 참았다 한다.
한국식으로 치면 '최 빵집'쯤 되는 이름인데, 미국에서는 이렇게 흔한 성이 많다. Smith(대장장이), Carter(짐꾼), Brewer(양조자)… 조상 직업이 그대로 성이 된 셈이라, 듣다 보면 마치 족보를 보는 기분이 든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막걸리입니다"이러면 한국에선 웃길 텐데, 미국에선 정말 평범하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따로 있었다. 회사에서 Buttweld(엉덩이 용접공?ㅎㅎ)씨 명함을 받았을 때, 표정 관리가 진짜 힘들었다. Pigg(돼지) 씨, Funk 씨... 미국 사람들은 태연한데 우리만 난리다.
미국에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결혼 후 이름 변화였다. 물론 남편의 성만 따르는 사람도 있지만, 둘 다 쓰는 사람도 있다.
성을 하이픈(-)으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Smith였던 사람이 Baker와 결혼하면 Smith-Baker이 된다. 두 집안의 성을 다 가져가는 방식이다. 이혼하면 다시 원래 성으로 돌아가니, 이름만 봐도 결혼과 이혼의 타임라인이 한눈에 보인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결혼이나 이혼, 혹은 삶의 변화로 이름이 바뀔 때마다 나한테 와서 서류상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종종 있다. 누가 Smith-Baker에서 다시 Smith로 돌아오면, 서류 수정하면서, ‘힘들었겠네’라는 생각이 절로든다.
이름 하나 바뀌는 게 그 사람의 삶의 한 장이 넘어가는 느낌이라, 단순한 행정 작업인데도 묘하게 그들의 이야기가 엿보이는 순간이다.
한국에서 개명하려면 법원 가야 하는데, 미국은 이름이 살아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 이름이 점점 길어진다.
“Jennifer So-Hye Lee-Millers"
Jennifer: 미국 이름
So-Hye: 한국 이름
Lee:원래 성
Millers: 결혼 후 남편 성
명함에 겨우 들어간다. 이름 하나에 정체성 네 개.
허 씨 성을 가진 동료는, 이름이 Hur로 쓰여 있어서 한국 출장을 갈 때마다 고생한다. 미국 본사와 한국 지사를 오가는 우리 회사에서, 그의 이름은 두 얼굴을 가졌다.
한국 지사:
"Hur 씨 전화 왔어요!"
한국 직원들: "헐!!!"(일제히 뒤돌아봄)
미국 본사:
"Mr. Hur?"
백인 동료들: 아무 반응 없음.
같은 영어 명함인데, 한국에선 감탄사, 미국에선 그냥 성씨. Hur는 비행기 탈 때마다 하루에 두 가지 정체성을 갖는다.
또 다른 동료는 '신'을 Shinn으로 쓴다.
미국에도 그런 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며, n을 하나 더 붙이면 발음도 부드럽고 조금 더 백인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철자 하나에는 '이곳에 속하고 싶다'는 조용한 바람이 숨어 있었다.
익숙한 이름의 끝에 작은 알파벳 하나를 더한 것뿐인데, 그사이에는 타국에서 살아남으려는 마음의 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문제는, 어떤 이는 'Sin'이라 철자를 쓴다는 것이다. 백인 동료들이 "Sin? 죄?"라며 미소 지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 이름 때문에 또 한 번'하고 따라 웃는다.
어떤 동료는 카페에서 이름 물어보면 항상 난감하다한다. "Jihye"라고 하면 "Jay-hee? Jay?" 결국 포기하고 "네, Jay요"한다.
그런데 진짜 웃픈 건 그다음이다.
"Jay! Jay!"
멍하니 서 있다가 옆 사람이 툭 친다. "저기요, 당신 커피요."아, 맞다. 내가 Jay였지. 영어 명함에는 Jihye Kim이라고 적혀 있지만, 카페에서는 늘 Jay다.
한국 지사 출장을 가면 "지혜 님!" 하고 세 명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미국 본사에선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미국에선 그냥 'J'로 산다. 백인 동료들이 "왜 J만 쓰세요?"라고 물으면, 설명하려면 긴 이야기가 된다.
미국 이름 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조상님 직업이 성이 되고,
결혼하면 성이 합쳐지고,
이혼하면 다시 돌아가고,
Hur가 '헐'이 되는 나라.
나는 오늘도 두 세계 사이를 걷는다.
Smith와 김 사이, Jennifer와 소혜 사이.
이름은 나를 가장 짧게 소개하면서, 가장 길게 설명한다.
그러니까 다음에 한국에서 누가 "미국은 어때요?"라고 물으면,
"일단 Buttweld 씨 얘기부터 할게요" 하고 시작해야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살짝 웃어봐요~
미국은 사람 이름이든, 길 이름이든, 대학 이름이든, 참 유쾌하다.
Baker는 빵 굽고, Fisher는 낚시하고, Slippery Rock은 미끄럽고, Chestnut Hill엔 밤이 열리고, Friends 대학에는 친구들이 많다. 이름부터 스토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