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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이 느끼할 리가 없잖아

맛의 역설, 맛의 온도

by Susie 방글이




며칠째 느끼한 미국 음식만 먹다 보니, 입 안이 기름막으로 코팅된 기분이었다. 피자, 까르보나라, 아보카도 토스트- 맛은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물렸다.


그래서 오랜만에 "바로 끓인 된장찌개 한 그릇"이 간절했다. 마침 새로 담근 김치가 맛있게 익어서, 그거랑 같이 먹으면 환상일 거라며 남편이 나섰다. 그는 냄비에 물을 붓고 된장을 풀었다. 그 순간, 공기 중에 퍼지는 된장 냄새가 반가워서 코끝이 먼저 웃었다.


드디어 뚝배기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두부와 애호박이 살포시 떠오를 즈음— 그는 자랑스럽게 국자를 내밀었다.


"맛 좀 봐봐."


한 숟가락 떠먹고 동시에 뚝배기를 쳐다봤다.

아니, 어째 이러지? 된장이 느끼하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느끼함을 피하고 싶어서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오히려 또 다른 느끼함을 맛봤다. 입안에서 번지는 이 묘한 배신감—"된장이 이렇게 느끼할 수도 있나" 싶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물 속에서 두부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나를 향해 "왜, 내 탓이야?"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된장찌개는 언제나 믿음직한 친구 아닌가. 밥상에 오르면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밥 한 숟가락에도, 김치 한 조각에도, 심지어는 그날의 기분마저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입안에 퍼지자마자, 구수해야 할 된장 맛이 묘하게 무거웠다. 짠맛과 텁텁함이 엉켜서 혀끝에 눌어붙는 느낌.


"느끼하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지만, 그건 분명 고깃기름이나 버터에도 쓰는 단어였다. 된장이 느끼할 리가 없는데— 순간, 언어가 입 안에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남편도 동시에 느낀 그 느끼한 맛. 아까워서 어쩌나 ㅠ
아보카도, 계란, 아루굴라 토스트 — 첫 입은 천국, 다섯입째부터는 살짝 느끼한 현실
첫 도전, 토르티야 피자! 성공적인 맛이지만 느끼함은 어쩔 수 없네.


구수함이라는 이름의 따뜻함


된장찌개의 국물은 원래 구수해야 한다. 구수하다는 말엔 '맛있다'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가 있다. 단순한 맛의 묘사가 아니라, 정서의 온도다. '구수하다'는 건 혀끝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알아차린다. 그래서 영어로 옮기면 맛이 반쯤 증발해 버린다.


It has a savory flavor.


그럴싸하지만, 왠지 모르게 건조하다. '구수하다'의 진짜 주인은 '맛'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그건 어릴 적 저녁, 엄마가 뚝배기 뚜껑을 여는 순간부엌에 퍼지는 냄새로 돌아가게 하는 단어다. 그 냄새 속엔 된장보다도 오래된 기억들이 천천히 졸아든다.



뜨거운 국물의 '시원함'


그리고 우리는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시원하다"라고 말한다. 이보다 더 모순적인 표현이 있을까. 그러나 그 '시원하다'는 말엔 단순한 온도가 아니라, 속을 뻥 뚫어주는 해방감이 들어 있다. 입에서는 뜨거움이 치고 올라오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서 오래된 답답함이 녹아내리는 느낌.


시원하다니?


그럴 땐 나는 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목욕탕 이야기가 떠오른다. 뜨거운 탕에 먼저 들어간 아빠가


"아~ 시원하다!" 하자,


어린 아들이 용감하게 들어가며 외친다.


"앗, 뜨거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ㅎㅎ


그 한마디 덕에, 뜨거움도 결국 시원해질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영어로 옮기려다, 혀끝이 먼저 멈췄다. Cool이라 하면 온도의 낮음을 뜻하고, refreshing이라 하면 차가운 오렌지 주스나 민트티가 주는 청량함을 떠올리게 한다.


둘 다 '온도'의 차이를 말할 뿐이다. 하지만 한국어의 '시원하다'는 다르다. 그건 온도를 넘어, 마음까지 식혀주는 말이다.

뜨거운 찜질방에서도, 답답한 속을 털어놓을 때도, 우리는 “시원하다”라고 말한다. 그건 불을 마시면서도 바람을 느끼는 역설, 뜨거움 속에서 찾아낸 시원함의 온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뜨거운 탕 속에서 그 온도를 배운다.


입에서는 뜨거움이, 속에서는 시원함이… 한 그릇의 수제비가 오래된 답답함까지 녹여준다.
뜨거운 국물만 시원한 게 아니다. 달콤하고 상큼한 키사벨 사과 (Kissabel Apple)도 마음을 뻥 뚫어준다. (프랑스에서 개발된 빨간 혹은 분홍 속살을 가진 사과 품종)


말에도 맛이 있다


음식의 맛이 혀끝에서 만들어지듯, 언어의 맛은 문화에서 익는다. 한국어의 '구수함'과 '시원함', 그리고 '느끼함'은 단어 이상의 풍경이다.


그래서 번역은 결국 미각의 통역이다. 완벽한 단어를 찾기보다, 그 감정이 어떤 입맛으로 전해지는지를 상상해야 한다.


"된장이 느끼하다"는 문장은 아마 영어로는 완벽히 옮길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The stew tastes oddly heavy."- 찌게 맛이 이상하게 텁텁하고 느끼하다.


그 한 문장에 '느끼함'과 '혼란', 그리고 '정겨움'이 조금은 담기지 않을까. 결국, 언어도 음식처럼 그렇다. 때로는 간이 맞지 않을 때가 있고, 뜻밖의 조합에서 새로운 맛이 난다. 오늘의 된장찌개처럼 말이다.




번역 팁: '입맛의 언어'를 옮기는 법



1. 된장이 느끼하다/ 음식맛이 느끼하다.

The doenjang stew tastes too heavy / rich.

(기름지다기보다는 입안이 텁텁하고 물린 느낌)


느낌 포인트: 단어보다 '입안의 피로감'을 표현하자.



2. 된장 맛이 구수하다

It has a deep flavor./ It has a savory flavor. / It has a homey flavor.


느낌 포인트: 맛의 묘사에 정서를 한 스푼 더 얹자.



3. 국물이 시원하다

The broth hits the spot and clears your throat. /

또는 It hits the spot, soothing from the inside out.


느낌 포인트: 온도가 아니라 '해방감'과 '후련함', 또는 '위안감'을 옮겨야 한다.

보너스: 무언가를 먹고 'It hits the spot.'이라고 한다면, '그래, 이거야!'하고 끄덕이는 순간이다.




맛의 언어는 결국,

입안에서 녹는 기억이다.

그게 번역이든, 된장이든.


결국, 느끼했던 된장찌개는 우리의 부주의가 만든 결과였다.우리는 너무 오래된 된장을 믿었고, 그 위에 핀 곰팡이를 보지 못한 채 끓여버렸다.


된장은 묵힐수록 깊어진다지만, 가끔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가 보다.


초가집, 된장 냄새가 입안에 스며드는 느낌. 왠지 이곳에서 한동안 지내보고 싶다.


맛도, 냄새도, 언어도, 모두 기억처럼 마음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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