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협상 온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상했다.
배 속이 간질간질, 마치 나비 몇 마리가 날아다니는 듯했다.
"I have butterflies in my stomach."
중요한 발표나 협상을 앞두고 있을 때 느끼는, 그 묘한 긴장감이다.
이 표현은 1900년대 초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긴장할 때 위가 살짝 수축하며 느껴지는 울렁임을 '나비의 날갯짓'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됐다.
설렘 반, 두려움 반 — 감정의 혼합물이다.
이럴 땐 커피 한 잔도, 명상도 소용없다.
그냥 나비들이 날개를 접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진: 고 1 학교 사진 수업에서 딸이 직접 기획하고 편집한 작품)
출근길, 차 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다소 굳어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본다.
"Put on a brave face."
'용감한 얼굴을 쓰다'는 뜻이지만, 속뜻은 괜찮은 척하기다.
이 표현은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걸 품격없다고 여겼던 시대에 생겨났다.
불안할수록 미소로 자신을 감추는 법 — 그 시대의 예절은,지금의 나에게도 필요한 방어 기술이 되었다.
오늘은 회사 보험 갱신 브로커와의 미팅 날이다.
숫자 몇 줄에 회사의 1년이 달린다.
보험료는 예산의 큰 덩어리고, 한 번 서명하면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
속이 타들어가도, 겉으론 웃는다.
이쯤 되면 '미소도 방어 기술'이다.
회의실 안 공기는 커피 향보다 더 진지했다.
브로커는 서류철을 꺼내며 말했다.
"이게 올해 갱신 금액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 위 숫자들이 줄 맞춰 서 있다가,
내가 한마디 꺼내자마자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Could we possibly lower the rate a bit?" (가격을 좀 낮출 수 있을까요?")
말끝이 커피잔 김처럼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웃었다.
"Let me take this back to my team." (팀과 상의해 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미소는 따뜻하기보다 정제된 금속 같았다.
"He gave me the cold shoulder."
직역하면 '차가운 어깨를 줬다.
이 표현은 19세기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의 소설 TheAntiquary에서 처음 등장했다.
환영받지 못한 손님에게 식은 양어깨살(cold shoulder of mutton)을 내놓던 풍습에서 유래했다.
그 말의 어원이 딱 오늘의 공기 같았다 — 겉으론 공손했지만, 그 어깨엔 닫힌 문이 걸려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마음의 온도는 화씨 98도에서 32도로 급강하했다.
회의실을 나올 때,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은 피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은 척'이 몸에 밴 사람의 표정.
협상이란 건 결국 온도의 싸움이다.
한쪽이 식을수록, 다른 쪽은 더 따뜻해야 버틴다.
오늘은 내가 식었지만,
다음 주엔 그들의 커피가 먼저 식기를 바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도 따라 길어졌다.
"I had a long face."
'긴 얼굴을 하다'—직역하면 어색하지만, 이건 우울하거나 실망한 표정을 뜻한다.
이 표현은 18세기말부터 'long-faced man'이란 말로 쓰였다.
슬플 때 얼굴 근육이 아래로 처지며 실제로 길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루 종일 숫자와 감정이 뒤엉켰더니, 얼굴마저 늘어진 모양이다.
오늘 하루, 내 감정의 영어 버전은 이랬다 —
나비로 시작해서, 용감한 얼굴을 쓰고, 차가운 어깨를 맞고, 긴 얼굴로 끝난 날.
이상하게도, 언어로 정리해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른 언어로 감정을 풀어내는 일은, 내 마음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일이니까.
- Butterflies in my stomach — 긴장하거나 설렐 때 쓰는 표현. 위가 수축하며 생기는 '나비의 날갯짓'에서 유래.
- Put on a brave face — 괜찮은 척하기. 감정을 숨기던 19세기 영국의 사회적 예절에서 비롯.
- Give someone the cold shoulder — 냉담하게 대하다. 환영받지 못한 손님에게 식은 양어깨살을 내놓던 풍습에서 유래.
- Have a long face — 우울하거나 실망한 표정. 슬플 때 근육이 처지며 얼굴이 실제로 길어 보이는 데서 온 표현.
영어의 감정 표현은 몸의 반응에서 시작되고,
한국어의 감정 표현은 마음의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직역보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의 체온을 옮기는 번역이다.
언어는 결국, 마음의 온도를 잴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구니까.
언어로 정리하니, 마음도 조금은 정돈되었다.
아마 다들, 그런 날이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