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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고 강렬한 한숨

나무 향과 현실 사이

by Susie 방글이





향나무 향기가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오후였다.

그는 조용히 나무를 켜고, 자르고, 갈고, 다듬었다.

그 위에 실을 꿰고, 매듭마다 vivid 한 색의 구슬을 달았다.

구슬들이 매듭 위에 작은 별처럼 앉자,

책갈피는 어느새 작은 우주처럼 빛났다.


몇 달 전 한국에 갔을 때, 우리는 우연히 한 공방에 들렀다.
나무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마침내 가방에 있던, 그가 만든 나무 책갈피를 공방 주인에게 보여주자
그는 감탄했다.

"이런 거 정말 멋있네요. 공방에 갖다 놓으면 잘 팔릴 거예요.
나무로 만든 것들 찾는 분들 많으세요. 기회 되면 팔아보세요.”

이곳은 작품들이 함께 숨 쉬는 공간, 손끝의 온기가 머뭅니다.


그 말이 남편의 마음에 조용히 남은 듯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팔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만든 책갈피들은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었고,

다들 예쁘다며 좋아해 주었다.

그저 좋아서 만들던 일이었는데,

어느새 손끝에 쌓인 시간과 정성이 눈에 들어왔던 걸까.

그는 계산기를 두드려보듯 속으로 물었다.

'이걸 판다면, 얼마를 받아야 하지?'

시간과 손끝의 노동을 떠올리던 그 순간—

그는 잠시, 현실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남편의 손끝은 나무의 마음을 다듬는 중이었고,

그의 한숨은 향처럼 천천히 번졌다.

그러다 그가 중얼거렸다.


"아, 현타 온다."


그 한마디가 공기 중에 퍼지며,

방 안의 나무 향보다 오래 남았다.


'현타'는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이다. 또는 현자(賢者)의 타임.

원래는 게임 속에서 태어났다.

가상의 캐릭터에 몰입하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싶은 순간.

그때 찾아오는 허무와 자각,

그게 바로 현타의 시작이었다.


이제는 누구나 겪는다.

열심히 뭔가를 하다가 문득, 일시정지된 화면처럼

모든 게 너무 또렷하게 느껴지는 순간.

감정의 브레이크가 살짝 밟힌 그 찰나,

현타는 조용히 찾아온다.


나무 향 가득한 작업실
조심스레 매듭을 묶고, 작은 구슬 하나하나에 이야기를 담아보자.


영어로 옮기자면 이렇다.


* "Reality hits me." (현실이 나를 강타한다. / 현실이 확 와닿는다.)


* "Snap back to reality." (현실로 돌아온다. / 정신이 번쩍 들며 현실로 복귀한다.)


* "I get a reality check." (현실 점검을 받는다. / 현실을 깨닫는다. / 현실의 벽을 느낀다.)


* "Feeling disillusioned." (환상이 깨진 기분이다. / 실망감을 느낀다. / 현실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하지만 이 표현들엔 '현타'의 미묘한 온도가 없다.

'현타'는 감정의 낙차로 느껴지는 단어다.

허무함과 자각, 약간의 자기 비웃음, 그리고 묘한 평온함이 한데 섞여 있다.

마치 웃음 끝에 쉼표도 아닌 마침표가 떨어지는 순간처럼.



번역의 기술 — 단어가 아닌 장면으로


그래서 '현타 온다'를 영어로 옮길 때는

단어 대신 장면을 보여주는 게 낫다.


"My husband was decorating the juniper wood bookmarks he made by hand.

The smell of wood filled the room, and the beads were vivid like tiny sparks of color.

Then he sighed and said, ‘Reality just hit me."


("남편이 손수 만든 향나무 책갈피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무 향이 방 안 가득 퍼지고, 구슬들은 작은 불꽃처럼 생생한 색을 뿜어냈다. 그러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현실이 확 와닿네.'")



틀리지 않았지만, 어딘가 부족하다.

영어에는 현타의 여백이 없다.

'현타'는 감정의 문장부호 —

마침표이자, 다시 시작하기 전의 정지 버튼이다.


남편은 여전히 나무를 깎는다.

나는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 향을 맡는다.

그의 손끝엔 집중이, 내 마음엔 약간의 멈춤이 있다.


책을 펼 때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나무 향기.

읽는 동안 마음이 잔잔해지고, 문장 사이로 나무의 결이 스며든다.
마음 같아선 우리 브런치 작가님들께 이 책갈피를 한 장씩 선물하고 싶다.


책 펼칠 때마다 향기가 솔솔~~~


언어는 감정을 담는 그릇이지만,

'현타'는 그릇 밖에 고이는 물 같다.

영어로는 다 옮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다.

그 덕분에 이 감정을,

이 짧고 완벽한 한마디로 남길 수 있으니까.


"아, 현타 온다."


손에 쥐가 나고 현타가 왔지만, 완성된 책갈피를 보니 웃음과 뿌듯함이 함께 찾아왔다.


이젠 하다 하다 못해 구슬쇼핑까지 간다.


때로는 현타가 찾아와도, 작은 행복과 함께 삶은 이어진다.






추신: 이 글은 절대 홍보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얼마면 사시겠어요? ㅎㅎㅎㅎ


https://brunch.co.kr/@susieyou7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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