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스며드는 권태
권태기(倦怠期)는 한자어로 '지치고 싫증 나는 시기'를 뜻한다.
원래는 삶 전반의 피로와 권태를 가리키던 말이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부부나 연인 사이의 슬럼프를 표현할 때 쓰인다.
아침에 남편이랑 커피를 마시는데, 또 그 말이 나왔다.
"가만있어봐."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안다.
이 말이 나왔다는 건, 남편이 생각에 몰입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에서 로그아웃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나는 그 옆에서 설거지를 시작했고, 남편은 "가만있어봐"의 어딘가에 붙잡힌 사람처럼 그대로 멈춰 있었다.
오늘의 토픽- '부부 권태기'?
꼭 그렇지만은 않다.
'권태기'라는 단어를 꺼내면 거의 반사적으로 부부를 떠올린다.
남녀, 싸움, 무기력, "우리 왜 이럴까"—그런 장면들.
근데 따지고 보면 권태기는 꼭 부부, 남녀 사이에만 오는 감정은 아니다.
미국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바로 the seven-year itch.
이 표현의 출발점이 꽤 코믹한데,
원래는 결혼 7년 차 권태기를 뜻하기 전, 피부 가려움증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즉, 오래 살다 보면 마음이 아니라 사람이 가려웠던 시절의 표현이었다는 것.
그러다가 이 '가려움'을 관계의 지루함에 빗대기 시작했고,
1955년 메릴린 먼로가 하얀 원피스가 펄럭이는 그 유명한 영화
'The Seven Year Itch'로 표현이 완전히 대중화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꼭 부부에게만 쓰이지 않는다.
오래된 것이라면 뭐든 간질거릴 수 있다는(?) 뜻으로 확장되어
일, 취미, 일상 루틴—심지어 싱크대 배수구까지—
7년쯤 되면 하나 둘 헐거워지는 법이라는 데 이상한 설득력을 준다.
그러니까 seven-year itch는
'오래된 관계나 일상에서 슬쩍 올라오는 미세한 권태감'이라는
생활 전반에 적용 가능한 넓은 표현이 되었다.
회사에서도 오고, 늘 먹는 메뉴에서도 오고,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슬쩍 오고,
심지어 아침에 거울 보며 "오늘도 나야?" 할 때도 온다.
삶이 잠깐 패턴에 들어섰다는 신호 정도다.
많은 관계에는 rough patch(힘든 시기) 같은 순간이 있다.
싸운 건 아닌데, 공기가 울퉁불퉁한 날.
남편이 “가만있어봐”라고 말하고,
정말 10분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는 순간.
그 짧은 정적은 길 위의 작은 과속방지턱 같다.
지나가면 다시 평평해지는, 지나치면 웃음이 나는 울퉁불퉁.
그리고 자주 a rut(반복되는 일상, 권태)에도 빠진다.
주말마다 "새로운 데 가볼까?"라 말하지만,
결국 늘 가던 식당으로 들어가 버린다.
지루한데 편하고, 편한데 또 그 편안함에 뒤척이게 되는.
spark(감정의 불꽃)도 예전 같진 않다.
불꽃이 사라진 게 아니라, 체력이, 체력이 사라진 거다.
설렘 대신, '오늘 뭐 먹지?' 같은 현실적 고민에 에너지를 다 쏟는 날.
하지만 현실 체력 소진형 피곤함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생기는 아주 가벼운 relationship fatigue(관계 피로).
남편이 "괜찮아?"라고 물을 때
진심인지, 그냥 습관인지 잠깐 헷갈리지만,
온도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겉으로 보면 같은 페이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서로가 한 장 한 장에 같이 또 따로, 같은 맥락의 페이지에 스며든다.
조용하지만, 조금씩.
한국어 '권태기' = 영어 단어 하나로 대응 불가
상황별로 표현하기
* 반복·지루함 - We fell into a rut. (우린 일상에 빠져 버렸어. / 권태기에 들어간 것 같아.)
* 감정의 밝기 감소- The spark is fading. (감정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있어.)
* 잠깐의 덜컹거림 - We’re going through a rough patch. (지금 잠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어.)
* 오래된 편안함 속 피로- I’m feeling some fatigue in the relationship. (관계에서 약간 지친 느낌이야.)
* 은유적으로 - It feels like we’re stuck in the same chapter of a long book. (마치 긴 이야기의 같은 장에 갇혀 있는 것 같아. / 같은 장을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야.)
* 원래는 결혼 7년 차 위기 표현, 요즘은 관계가 오래되며 찾아오는 일반 권태기에도 폭넓게 사용– We might be hitting the seven-year itch. (우리가 권태기에 접어든 것 같아.)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권태감은 부부 사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아무 일 없는 하루 틈에도 슬그머니 스며들어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보면 괜히 한숨이 먼저 나오고, 별일 아닌 것들도 밍밍하게 느껴진다.
그런 순간을 우리는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 지루한 일상 표현- Everything feels a bit “same old, same old."( 모든 게 똑같고 지루하게 느껴져.)
* 질린 음식- I’m kind of tired of this.(이거 좀 질렸어.)
* 무기력 + 권태 섞인 상태- I feel like I’ve lost my energy lately. (요즘 에너지가 다 빠진 느낌이야.)
또는 I don’t really feel like myself these days. (요즘 내 모습 같은 느낌이 안 들어.)
* 변화 욕구 표현- I’m craving something new, but I don’t know what. (새로운 게 간절한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어.)
번역 팁만 보면 조금 딱딱할 수 있지만, 결국 권태기의 본질은 '삶 속 여러 반복과 익숙함'을 이해하는 데 있다.
권태기는 결국, 우리가 오래 함께 걸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
사람이든 일상이든 취미든, 지루함이 찾아왔다는 건 이미 그 세계의 '단골손님'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단골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와 가벼운 개그 포인트도 그때 비로소 보이기 마련이다.
가을엔 같은 챕터라도 한 장쯤 새로 넘겨본다.
익숙함 속에 작은 모험을 끼워 넣는 것, 우리는 그렇게 계속 읽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