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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이 아니다

놔두고 가는 거다, 잠시

by Susie 방글이





노트를 정리하다 오래 전의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페이지 사이에 눌린 작은 메모 조각은, 그때의 마음을 조용히 품은 작은 타임캡슐 같았다.

생각이 많던 시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적어두었던 짧은 문장.

그때의 나는 관계와 일 사이, 내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오래 들여다보던 시기였다.


그 문장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놔두고 가는 거다."


가끔 어떤 문장은 시간을 건너와 나를 멈춰 세운다.

단어는 간단하지만, 그 안의 결은 번역되지 않는다.

읽는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흔들렸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창문이 갑자기 스르르 열리듯이.


나는 이 말을 영어로 옮기려다 한참을 머물렀다.


It’s not running away, it’s leaving it behind.


문법은 완벽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허전했다.


'run away'의 속도를,

'놔두고 간다'손의 떨림을 말한다.

하나는 소리를 남기고, 하나는 침묵을 남긴다.

그 차이를 문장 하나에 담기란 쉽지 않다.


'도망간다'는 말속에는 죄책감이 있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없어서 더 빨리 걷는 마음.

'놔두고 간다'에는 수긍이 있다.

잡지 않음으로써 지키는 방식,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하는 마지막 인사.


어떤 관계는 문을 닫고 나오는 일이 아니라,

불을 끄고 조용히 나오는 일에 가깝다.

그런 떠남에는 흔적이 없지만, 온기가 있다.


언어는 마음의 지도다.

영어는 길을 그리지만, 한국어는 그 길 옆의 그림자까지 그린다.

직선과 여백의 차이, 설명과 온기의 차이.

그래서 번역은 길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그늘의 모양을 다시 그리는 일이다.


사람들은 때로 어떤 자리에서 벗어나려 한다.

익숙한 루틴, 오래된 관계,

그 안에는 이미 식은 온기와 예의뿐이다.

누군가는 그들을 보고 "도망간다"라고 말하겠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이건 도망이 아니라,

머물렀던 흔적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놓아두다'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놓'와 '두다'가 합쳐져 있다.

'놓다'는 손을 펴는 동작,

'두다'는 마음을 남겨두는 행위.

떠남과 남김이 동시에 들어 있는 단어.

그래서 '놔두고 가는'건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내 안의 균형을 되찾는 일이다.


나는 이제 이 문장을 번역할 수 없다.

아니, 굳이 번역하지 않으려 한다.

언어의 경계 위에 조용히 놓아두기로 했다.

그 모호함이 오히려 내 마음을 닮았으니까.


그래도 메모는 남겨둔다.


It’s not running away-

It’s walking away with eyes open,

leaving behind what no longer looks back.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도, 남긴 흔적엔 늘 존중이 깃든다.


번역 메모



-run away: '두려움의 속도',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내달리는 마음.


- leave behind: '인정의 속도'. 남김을 허락하는 용기.


-'놔두다'의 이중성: letting goleaving intact 사이.

하나는 끊음이고, 하나는 남김이다.


-번역이란 단어의 이동이 아니라 감정의 결을 옮기는 일이다.


그래서 좋은 번역은 정직한 해석이 아니라, 섬세한 변주다.

원문을 완벽히 따르지 않되, 그 마음을 더 멀리 데려가는 일.


뒤돌아보지 않아도, 머물렀던 시간은 기억된다.


언어는 결국 마음의 또 다른 번역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완벽한 해석 대신, 나를 가장 닮은 어휘 하나를 찾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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