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깎아야 예의일까

통째 또는 조각

by Susie 방글이





아침마다 과일을 깎는다. 사과, 미국 배, 심지어 바나나도 먹기 좋게 잘라 접시에 담는다.


바나나는 굳이 자르지 않아도 된다. 신이 이미 완벽한 포장 상태로 만들어 두신 과일 아닌가. 칼도 필요 없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면 바로 먹을 수 있는데, 나는 굳이 도마 위에 올려 동그랗게 썬다. 가끔은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바나나를 먹는 걸까, 예의를 준비하는 걸까.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이 아침 의식만큼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여기서 과일은 꽤 독립적이다. 사과는 손에 쥐고 길을 걸으며 와작 베어 무는 존재이고, 딸기와 블루베리는 그릇에 담겨 "각자 알아서"라는 태도를 취한다.


물론 미국에도 과일을 잘라 담는 방식은 있다. 브런치 테이블에 오르는 fruit platter, 잘게 섞어 놓은 fruit salad.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순간 과일은 더 이상 그냥 과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름이 붙는다. 하나의 메뉴가 된다. 자르지 않고 그냥 두면 '과일'이지만, 자르는 순간, 평범함에서 한 단계 올라가 특별해진다.


반면 내가 자라온 풍경 속 과일은 늘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나왔다. 껍질은 벗겨지고, 씨는 도려내지고, 한입 크기로 정돈된다. 과일은 혼자 나오지 않는다. 항상 '준비된 얼굴'로 등장한다. 마치 손님처럼.


껍질을 그대로 두고도 충분히 예쁜 과일들.


껍질을 그대로 둔 얼굴과 한입 크기로 정리된 얼굴이 나란히 앉아 있다. 예의도, 자유도, 둘 다.


Fresh Fruit Platter , 이름이 붙자, 조금 더 특별해졌다. $ 75 달러라는 가격표가 붙는다. (Photo by: The Green Grape)


사과를 깎다 보니 생각이 여기까지 흘렀다. 왜 이렇게 다를까.


가만히 보니 과일의 종류부터 다르다. 한국에는 껍질이 두껍고 단단한 과일이 많다. 배, 감, 참외 같은 것들. 칼이 지나가야 비로소 속을 보여준다. 마치 속마음을 쉽게 내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미국 과일은 조금 다르다. 사과도 껍질째, 베리류는 씻기만 하면 끝. 굳이 벗기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열린 얼굴이다. 어쩐지 문화의 성격과도 닮아 있다.


손님을 맞는 방식도 그렇다. 한국에서 집은 접대의 무대다. 누군가 오면 냉장고를 열고, 접시를 꺼내고, 칼을 찾는다. "뭐라도 내놔야지"라는 마음이 자동으로 작동한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가 게으른 사람이라도 된 듯 괜히 손이 바빠진다.


미국에서는 방문이 훨씬 가볍다. "편하게 와." 상차림보다 소파가 먼저 준비된다. 오히려 손님이 와인 한 병을 들고 오는 일이 더 자연스럽다. 집주인이 모든 마음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결국은 '정성'을 보여주는 방식의 차이 아닐까. 한국에서는 시간을 들여 준비하는 것이 배려가 된다. 과도가 지나간 흔적이 곧 마음의 흔적이다. 미국에서는 편안함과 자율성이 배려가 된다. 각자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과일 좀 깎아줄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곳과 "Help yourself."가 더 다정하게 들리는 곳이 나뉜다.


통째로, 마음껏, 자유롭게. 미국식 부엌의 간단한 법칙.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웃음이 났다. 나는 지금 바나나 하나를 자르면서 문화인류학 논문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문득 요즘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K-컬처가 떠올랐다.


우리는 참, 그냥 두어도 될 것을 한 번 더 다듬는다. 드라마 한 장면에도, 음식 한 그릇에도, 화장품 하나에도 괜히 손이 한 번 더 간다. 보기 좋게 정리하고, 먹기 좋게 준비하고, 쓰기 좋게 다듬는다. 어쩌면 과일을 깎는 습관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바깥세상에서는 그걸 꼭 그렇게 먹지 않아도 괜찮다. 자막으로 드라마를 보고, 김치를 자기 식대로 요리해 먹고, 라면에 치즈를 올리든 말든,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즐긴다. 우리는 정성껏 차려 내놓았지만, 먹는 방법은 각자의 몫이다.


생각해 보면 그게 더 근사하다. 완벽하게 준비해도 되고, 통째로 베어 물어도 된다. 이름이 붙어도 좋고, 그냥 두어도 좋다. 중요한 건 결국, 맛있게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나는 아직도 과일을 깎아 준비해 놓아야 할 것만 같다.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사과를 보면 내 마음도 조금은 정렬된 느낌이 든다.


그래도 가끔은 실험을 한다. 사과를 통째로 들고 한입 베어 문다.


와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의가 무너지지도, 정성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다만 방식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그 순간 문득 '아름답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지만, 그중에는 '안다'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알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두 팔로 안을 수 있는 만큼을 '한 아름'이라 부르듯, 내가 품을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혹은, 알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과일도, 문화도 비슷하다. 왜 깎는지 알게 되면 그 수고가 부담이 아니라 배려로 보이고, 왜 통째로 베어 무는지 알게 되면 그 태도가 무심함이 아니라 자유로 읽힌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조금 더 아름다워진다.


이름이 붙으면 특별해지는 문화가 있고, 이름이 없어도 충분히 정성인 문화가 있다.


그래서 두 방식 모두 틀리지 않다. 다만, 배려와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결국 사람 사는 풍경,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한입 베어문 사과, 하트 모양! 예의로 깎든, 마음 가는 대로 통째로 먹든, 결국 중요한 건 즐겁게 맛보는 일이다.


맛있게 먹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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