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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잡은 미국 마을

오렌지 라이트의 정체성

by Susie 방글이


요즘 세상은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지만, 우리 집엔 유독 "직접 만들어야 제맛"이라는 철학을 가진 남자가 있다. 바로 내 남편이다.


남편은 곶감을 사랑한다. 그냥 사랑이 아니다. 가을이 되면 감 얘기만 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먹던 쫀득한 감의 맛을 잊지 못하는, 입맛이 좀 올드한 남자다. 가을바람이 살랑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그 말이 나온다.


"감 철이다! 감 사러 가자!”


미국 땅에서 감 사러 간다는 소릴 5년째 듣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첫해엔 동네 한국 마켓에서 감을 잔뜩 사 와 썬룸 벤치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실에 감을 하나씩 꿰어 매달며 어찌나 몰두하던지, 마치 사극 속 장인처럼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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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1167.jpeg 가을 햇살 아래 주황빛 감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꼭 작은 등불 같았다.


저녁이면 동네에 흔히 물드는 붉은 노을과 어우러져 우리 집 뒷마당이 그림처럼 풍요롭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가면 이웃들이 하나같이 신기한 듯 묻는다.

"저거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뭔가요?"

처음엔 정색하고 설명했다.

"그거요? 퍼시먼(Persimmon)이에요. 먹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고, 비타민C도 풍부하고, 소화촉진에도 좋고…"

그렇게 감의 역사와 효능까지 줄줄 읊다 보니, 듣던 이웃의 눈이 슬슬 풀리는 거다. 아… 이건 아니다 싶어 요즘은 그냥 이렇게 대답한다.


"오렌지 데코레이션 라이트!"


그러면 다들 "오~ 쿨~"하면서 넘어간다. 사실 이게 뭐라고… 우리 동네에선 이제 '저기 감 매달고 다니는 집'으로 소문이 났다. 이쯤 되면 감 농장 하나 차려야 하나 싶다.


그런데 감 말리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남편이 만드는 것은 일명 반건시 곶감이다. 비바람이 불면 감이 툭툭 떨어졌고, 어느 날 밤늦게 뒷마당에 나갔다가 떨어진 감 하나를 보고 그냥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확인해 보니, 그 감이 감쪽같이 사라진 거다! 우리는 가끔 놀러 오는 야생 토끼를 의심했다. 남편은 "이 녀석들, 감 잡았군!" 하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애가 탔는지 새벽마다 몰래 감 점검을 나갔다. 그러다 떨어진 감을 주워 먹어보더니, 덜 마른 감의 떫은맛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에이… 아직 멀었네!!


그 모습을 보던 딸은 처음엔 “이걸 왜 먹어?”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딸은 자기가 안 좋아하는 건 관심이 없지만 감이 쫀득쫀득하게 마르자 몇 개를 집어먹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진짜 맛있네. 쫀득하고 달달한 게, 젤리 같아! 파는 곶감 하고는 차원이 다르네!"


그러더니 감을 손에 들고 뒷마당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오… 좀 하는데?!”

그 순간, 남편은 딸에게 "감이 좀 와?" 하며 너스레를 떤다.

곶감을 두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딸과 남편의 모습이 참 따뜻했다.


둘째 해, 코로나가 한풀 꺾일 무렵 남편은 한국에서 '곶감 걸이'를 사 왔다. 작업 속도는 세 배, 생산량은 두 배! 남편은 마치 감 말리기 스타트업의 CEO라도 된 듯 의기양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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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엔 지인들에게 "집에서 직접 말린 곶감이에요"하며 선물도 돌렸다. 감을 건네받은 지인들은 “이거 주문해도 돼요?” 하며 감탄했고, 남편은 그 말에 한껏 신났다.


"우리 감 브랜드로 '뒷마당 프리미엄 곶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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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한참 웃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감을 직접 말리냐며. 하지만 생각해 보면, 먹거리가 넘치는 세상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정성스레 만드는 남편의 마음이 참 따뜻하다. 감 말리기는 남편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한국의 가을, 늘 먹던 곶감을 떠올리며 가족과 추억을 쌓는 시간이다.


작년엔 남편이 또 기발한 일을 벌였다. 곶감을 “업그레이드” 한다며 수정과를 만들겠다고 부엌을 점령했다. 생강을 썰고 계피를 던져 넣더니, 마치 마법사처럼 냄비를 휘젓는 거다. "이건 곶감의 소울메이트" 하며 눈빛이 반짝. 집안은 금세 계피냄새로 진동을 하고 결국 수정과가 완성됐다.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내가 말했잖아. 기가 막히다고!" 하며 곶감 한 조각, 잣 동동 띄운 수정과 한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올해도 뒷마당엔 주황빛 감들이 주렁주렁 걸릴 것이다. 마른 감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바람에 퍼지고, 뒤뜰에 매달려있는 감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남편은 여전히 "음, 아직 덜 말랐군"하며 감을 점검하고, 딸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날로 발전하시는데?” 하고 장난칠 것이다. 저 멀리 노을이 지면, 우리 집은 주황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감 하나하나에 남편의 정성과 우리의 추억이 담겨있다. 내년엔 또 어떤 감 모험을 하게 될까? 혹시 남편이 감껍질 까는 기계를 들여오는 건 아닌지. 나는 웃으며 맞아줄 것이다. 우리의 가을은 언제나 주황빛으로 물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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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가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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