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명당
나는 낮잠을 못 잔다.
아니, 못 자는 줄 알았다.
"지금 당장 해야 해!"라는 성격 탓에 머릿속 브레이크가 망가진다.
눈을 감으면 온갖 생각이 달려든다.
'설거지 쌓였네.' '잡초 뽑아야겠지?'
심지어 아침에 온 문자 이모티콘에 숨은 뜻까지 고민한다.
그렇게 잠은 쏙 달아난다.
남편은 정반대다.
비행기만 타면 이륙 전부터 코를 곤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 가는 6시간 비행에서도 앉자마자 잠들었다.
나는 옆에서 영화 2편, 간식 두 번, 창밖 구름만 멍하니.
코 고는 남편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 머릿속은 대체 뭐로 채워진 거지?’
너무 잘 자는 남편이 어쩔 땐 얄밉다.
딸은 더 신기하다.
집에 오면 "엄마, 나 뭐 좀 할게" 하더니 소파에 눕자마자 기절.
'어떻게 저리 빨리 잠드는 거지?'
깜짝 놀라 쳐다보면 이미 꿈나라다.
그런데 30분 낮잠 후 일어나서 할 일을 척척 해낸다.
낮잠 잤다고 일이 밀리는 것도 아니더라.
그 태연한 템포, 나도 배우고 싶다.
우리 강아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침에도, 밥 먹고도, 남편 배 위에서 늘 잔다.
모두 잠든 사이, 나만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긴다.
그 외로움, 아는 사람 있을까?
가장 황당했던 건 남편의 잠꼬대다.
소파에 누운 남편에게 "여보, 앞에 잡초 뽑을까" 물었더니,
"그래, 해 좀 들어가면 뽑자."
'깨어 있구나'싶어 장갑을 미리 챙겨두며 물었다.
"삽도 챙길까? 뿌리까지 뽑아야 하잖아?"
대화가 척척 이어지던 순간, 딸이 거실로 내려왔다.
"엄마, 아빠 자는데 누구랑 얘기해?"
…네, 남편은 자고 있었다.
몇 시간 뒤 "해 좀 들어갔어, 나가게, " 했더니,
"어디 가게?"
장갑 쥐고 서 있던 내가 억울했다.
그러다 정말 피곤한 날이 왔다.
몸도 마음도 탈탈 털린 날.
머릿속은 "지금 해야 해!"를 외쳤지만, 남편이 말했다.
"그냥 자. 생각 좀 멈춰."
'그래, 잡초야 자라면 어때.'
눈을 감았고, 30분 정도 낮잠을 잤다.
일어났을 때, 세상은 멀쩡했다.
설거지는 그대로, 잡초도 그대로, 강아지와 남편, 딸도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낮잠처럼, 인생도 잠시 멈춰도 괜찮다.
지금 당장 모든 걸 완벽히 해내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간다.
남편처럼 비행기에서 잠드는 사람, 딸처럼 순식간에 기절하고 척척 일 해내는 사람,
강아지처럼 종일 자는 존재, 그리고 나처럼 생각으로 브레이크 망가진 사람.
모두 각자의 템포와 자세?로 산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엔 서로 닮은 구석이 참 많은 부녀가 있다.
낮잠도 그렇다. 둘 다 소파에 누워 몇 초 만에 꿈나라로 직행.
낮잠 자고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아무 말 없이 각자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심지어 어떤 날은 둘이 낮잠에서 깨어나더니, 집 앞마당에서 뭔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뭐 해?" 했더니 딸이 손짓으로 가까이 와보라고 한다.
보니, 늑대 거북이(Snapping Turtle) 한 마리가 우리 집 앞 잔디까지 기어들어 온 것.
어디서 왔는지 알 길 없지만, 둘은 묻지도 않고 호흡 척척 맞춰
온몸에 들러붙은 거머리도 띄어주고 물도 주고
박스랑 물통을 가져와 거북이를 조심조심 구조했다.
"이 친구, 근처 개울에 데려다 주자."
남편이 말하면, 딸은 벌써 거북이 담은 플라스틱 통울 들고 섰고.
나는 그걸 멀뚱히 보며 또 생각했다.
'대체 이 부녀는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걸까? 어쩜 저리 닮았대?'
그날도 낮잠 자고 일어나 동물 구조하고, 자기 할 일 다 해내더라.
그걸 보며,
'그래, 나는 못 자도 된다. 누군가는 자고, 누군가는 깨 있고, 또 누군가는 거북이를 구하고…'
우리 집은 그렇게 각자 템포로 산다.
다들 어떤 템포로 쉬고 계시나요?
아마 그 거북이도 낮잠 명당 소문 듣고 우리 집 마당까지 기어 온 거 아닐까.
낮잠 자다 보면 거북이도 온다.